희살(戱殺)짓는 바람의 장난에 이제 갓 피어난 벚꽃들이 고공무용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치고는 한 번 쥐어박고 싶은 심술쟁이였다. 소복한 무용수의 춤사위마다 안쓰러움을 더해 주는 못된 놈이었기 때문이리라.
바람의 심술이 아녔다면 벚꽃들의 축제가 우리 눈을 보름이나 스무날은 너끈히 더 즐겁게 해 줬을 텐데, 바람은 그걸 못 참아 꿈을 펼치지도 못한 그 가녀린 것을 하늘로 날려 버리다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순간 잠자고 있던 생각 하나가 깨어나는 것이었다. 희살짓는 바람에 그냥 가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는지 그 예쁜이들은, 내가 못 잊어하던 그 골동품 시절의 그리움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고공무용에 빠져 있던 벚꽃들은 그 무슨 마술이 걸렸던지 골동품 시절 눈발 아래 펼쳐졌던 낭만의 추억을 단숨에 불러다 주는 것이었다.
소복한 무용수의 벚꽃들은 온 하늘을 고공무용으로 수놓고 있었다. 그것들은 수십 년 전의 그 아까운 시절의 추억을 반추하게 하고 있었다. 또 마음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 흰 눈이 아닌 벚꽃천지였지만 옛날을 불러오는 회상과 연상의 매체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겨울도 아닌 봄에 눈 생각으로 겨울을 떠올리게 하다니 요술쟁이의 마력은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흰 눈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낭만의 대명사임에 틀림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눈만 내리면 좋아한다. 눈이 내릴 때면 소파 옆에 졸고 있던 멍멍이도, 귀염둥이 보미도 마냥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그리움으로 보고픔으로 알알이 영글어 가는 순희 마음도 영식이 마음도 영락없는 연인이 되어 그 새하얀 눈길을 걷게 만든다. 나도 그런 보석 같은 추억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숨겨 놓은 골동품 추억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오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무엇인가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부터 머리를 쳐들고 나온 골동품 추억들을 선을 보여야겠다.
나는 70년대 덕산고등학교 발령을 받아 부임을 했다. 그것도 20대의 풋풋한 나이로서 교사 첫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었다. 내 나이 풋풋한 총각이었지만 지도를 받아야 할 학생들도 다 큰 처녀 총각이라고 해도 욕될 것이 없는 남녀 고등학생들이었다.
내가 총각교사라서 그런지 수업 들어가는 반 모든 여학생들의 눈동자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선생님을 교사로서 바라보는 눈초리가 아니라 이성을 대하는 야릇한 감정의 표정들이었다. 하나의 표적을 놓고 그것이 남의 것이 되게 하지 않게 하려는 동물 본성이 하나하나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눈이 내렸는데 겨울 첫 눈치고는 제법 많이 내린 눈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여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설레는 마음으로 들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침 점심시간에 여학생 반장이 와서 밖에 나가 눈싸움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나도 망설일 게 없었다. 그러자고 했다. 출석 번호를 홀수 짝수로 나누어 하자고 했다. 그것도 반장 말 그대로 했다. 나는 홀수 편이 되라고 했다. 말하자면 홀수번호가 나의 아군이고 짝수번호는 적인 셈이었다.
누구의 신호라고 할 것도 없이 눈덩이가 툭탁,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눈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예서제서 아우성을 지르며 포탄이 날아오듯 눈덩이 세례였다. 전후좌우에 떨어지고 머리위로 날아가는 게 위력적인 눈덩이뿐이었다. 잘못하다간 눈 폭탄으로 어떤 위기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분명 홀수 번호와 짝수 번호의 대결이었는데 눈덩이는 나한테만 날아오는 거였다. 집중사격 목표물이 내가 된 것이었다. 상황 돌아가는 게 결과가 보이는 싸움이었지만 해 보지도 않고 백기를 들 수는 없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인 것을 알면서도 그냥 무너질 수는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달리고, 눈을 뭉치고, 던졌다. 짓궂은 여학생 네댓 명이 끈질기게 쫓아와 전후좌우에서 눈 세례를 퍼부었다.
운 좋게 비켜간 것도 있었지만 그 중 하나가 보란 듯이 뺨을 후려치는 거였다. 정통으로 맞아서인지 볼이 얼얼했다. 일그러진 얼굴에, 복수심에, 반격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을 바라보니 모두가 적이었다. 전후좌우로 에워싼 홀수 작수 번호였지만 내 편은 하나도 없었다.
어찌된 셈인지 적인 짝수번호는 물론 아군인 홀수 번호도 나를 공격하는 것이 한통속인 것이 분명했다.
눈싸움은 처절하게도 나의 완패였다. 전쟁과 싸움에는 정보가 승패의 관건인데 나는 정보에 어두워 결국백기를 들고 만 것이었다. 반장이 눈싸움을 하자고 왔을 때 감춰진 속셈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나는 그걸 못한 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반 쑥덕공론으로 모사를 꾸몄던 것이었다. 모양새만 홀수 짝수 편을 가른 눈싸움이었지 그건 술책에 불과한 거였다. 눈싸움이 시작되면 출석번호 관계없이 합세하여 일제히 선생님(나)을 공격하여 골탕을 먹이자고 약속이 돼 있었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여학생들 전원이 총각선생님(나) 하나를 눈뭉치로 공격해 놓고 쩔쩔매는 꼴을 보고 기뻐하자는 속셈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사디즘(sadism)의 대상에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맞은 눈뭉치들은 날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학생들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적은 물론 아군도 내 편은 아니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나에게 덤빈 것은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는 세월에
그들은 모두
남편이란 나무, 아들딸이란 나무까지 챙기는 엄마라는 큰 산이 되었다.
가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족, 동료, 상사라는 나무를 챙기고 위하며,
나라를 위하는 늘 푸른 애국으로 큰 산 몫을 다하는 엄마가 되었다.
'적은 물론 아군도 내 편이 아니었다.'
옛날의 눈덩이는
나를 아프게 했지만
그 마음은 진정한 사랑의 눈폭탄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잰 산에 가득한
이 나무 저 나무들이 탄소동화작용을 잘 할 수 있도록
핵폭탄 눈덩이 사랑을 용광의 가슴으로 태워주길 바란다.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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