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혜 교사 |
안타깝게도 필자는 어렸을 적부터 멋진 제복을 입은 경찰이 되고 싶었다. 사회 정의 구현을 늘 머릿속에 그리며 말 그대로 부모님의 간절한 바람과 설득, 수능의 굴레 속에 교대에 홀몸으로 던져졌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그러하셨듯 대학에 그렇게 많이 준비하고 갖춰서 가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가면 다 하게 되어 있다고.
하지만 교사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철들기 전 꽤 오랜 시절 선생님의 말씀을 안 듣는 말썽꾸러기 '문제아'였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생활을 거부하면서도 멋진 경찰을 꿈꾸는 아이러니함도 물론 있었지만, 누군가는 분명 그 시절 나의 반항기 어린 눈빛과 행동들을 떠올릴 것이다. 항상 삐딱이 같던 나는 나만 바라보는 학생들의 그 똘망거리는 예쁜 눈빛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교대 진학과 동시에 한 번도 꿈꿔보지도, 그려보지도 않은 미래를 그려야 했다.
교사가 되겠다는 진학 포부를 들은 내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안 어울려. 좀 더 진취적인 무언가 없어? 아니 교사라니. '꿈'보다 '안정'을 찾아갈 줄은 몰랐다."
예상은 했었지만 '안정'을 쫓아간다는 주변 친구들의 웃음 어린 반응을 보니 슬그머니 오기가 발동했다. 문득 교직에도 나 같이 시련도 겪어보고, 반항도 해본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가끔은 보이지 않는 곳에도 길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오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타고난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교사라는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만 시간의 법칙'은 흔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법칙. 매일 3시간씩 훈련하면 10년쯤 걸린다는 그 말처럼 교사로서 학생들을 만나는 15년 남짓한 시간에 '전문가'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나름의 정의로 '교육관'을 가진 교사의 모습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교사는 수업으로 말한다. 수업도 결국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이고 그 관계는 결국 '학생에 대한 인정'에서 나온다. 수업이라는 매시간의 성장 과정에서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자라지 않고 모두가 같은 속도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방향의 차이를, 속도의 다름을 인정해주는 그런 교사. 학생의 성장과 동시에 교사도 함께 자랄 수 있는 수업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학생에 대한 인정은 학창시절 성장통을 심하게 겪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수월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교실이 비었다. 학생이 없는 교실. 필자의 교육관이었던 '관계'와 '인정'의 상관관계를 다시 한번 또 증명해 줄 학생들이 각자 집에서 직접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다른 형식의 수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의 상황에 1만 시간 법칙을 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15년 전의 신규 교사와 다를 게 없게 된 것이다. 수업은 언어적인 요소도 뿐만 아니라 비언어적인 요소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학생들의 살아 있는 눈빛, 웃음, 함께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생기 어린 분위기를 화면 너머로만 느끼고 있는 언택트의 시대. 물리적 공간에서 함께 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힘인지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이세돌 9단이 나온 것을 보았다. 2016년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인간의 승리를 보여주었던 그 짜릿했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그 간절함을 다시금 느껴진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코로나19에 온몸으로 맞서는 인류. 그 싸움에서 하루빨리 인간이 승리하길 빌고 또 빈다. 그래서 어서 우리 학생들을 학교로 돌려 보내주길. 다시 마스크를 벗고 함께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관계'와 '인정' 사이의 상관관계를 학생들 스스로 웃으며 증명해줄 수 있는 그 날이 다시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윤지혜 대전글꽃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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