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4월20일 중도일보 4면. 오른쪽 상단에 박용래 시인의 '풀각씨' 시가 게재됐다. |
충남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박수연 교수는 1958년 4월 20일 자 중도일보 신문 4면에서 '풀각씨'라는 시를 찾았고, 다수의 미발표 시와 함께 '영화가 있는 문학의 오늘' 36호 가을지에 이를 발표해 눈길을 끈다.
'풀각씨'는 해방 공간에서 발표된 시로 박용래 시인의 시 세계를 더욱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박용래 선생의 전집은 물론 대전문학사의 흐름 또한 수정 보완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박수연 교수는 "해방 이후 대전 문인들은 중도일보 등 주요 신문에 작품을 발표해 왔다. 신문은 문인들의 욕구를 실현해주던 주요 발표지였던 것인데 풀각씨를 통해 이를 다시 한번 재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수연 교수는 '풀각씨'와 함께 '우유꽃 언덕(동방신문 1949.11.18)', '그 무렵의 바닷가(동방신문 1949.12.8)'도 함께 미발굴 시로 발표하는데, 박용래 시인이 눈물과 서정시인으로 불리게 된 어느 결정적 단서를 세 편의 시를 통해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수연 교수는 "세 편의 시가 가진 공통점은 소멸하고 망각되는 주변적 존재들에 대한 애상감"이라며 "풀각시는 봄철 놀잇감으로 삼기 위해 풀로 만든 인형이다. 시의 시간적 배경은 대지에 새싹이 솟아나기 시작하는 봄철로 풀각시가 곧 시인을 포함한 우리로 이어지는 결론을 통해 가진 것 없이 피멍이 든 가난한 존재들의 모습을 보고 다독이는 시"라고 분석했다.
박용래 시인은 해방 이후 대전에서 간행된 문예지 '현대'지의 진보적 문인들과 어울렸다. 그때 당국에 수배됐던 김만선 소설가가 대전에 내려와 피신 생활을 하는데 문학가 동맹 대전지부 구성원들과 자주 만났다. 이후 대전 진보 문단에 큰 풍파를 발생하는데, 몇몇 문인이 당국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태 후 박용래 시인은 진보 문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박용래의 시 세계는 해방공간에서의 그의 활동들을 복원함으로써 그가 문단 정치까지 포함해 돈 벌고 권력 잡는 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특별한 순간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현실의 비극을 배움에 둔 시적 순간들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로 답할 수밖에 없던 서정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다시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수연 교수는 대전문학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서는 해방 공간에서의 문학적 사건, 문학적 원본들이 필요한데, 이 기록은 원본을 찾을 수 없는 중도일보 초창기 신문이 핵심적 단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연 교수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중도일보 신문이 발굴돼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중도일보 등은 주요 문인들의 발표지였는데, 중도일보의 초창기 신문이 발굴된다면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대전 주요 문인들의 미발표시, 대전 문학사의 흐름을 보여줄 수 있는 주요 문학 작품이 다수 담겨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면서, "박용래 시인의 시는 단순히 아름다운 이미지의 서정시가 아니다. 식민지와 해방공간의 이념 갈등과 세계사적 분단의 한국전쟁을 고스란히 통과하면서 떠밀린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목소리가 내포돼 있다"고 분석했다.
이해미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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