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주민초본이 반성문을 쓰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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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주민초본이 반성문을 쓰게 하다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20-09-11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나는 최근에 부동산 토지 분할 문제로 주민등록 초본을 떼 본 적이 있다.

발급받은 주민등록 초본에는 놀랍게도 주소 변동 - 이사 횟수 - 이 무려 A4 용지 3장으로 이사 횟수가 31번이나 되었다.

나는 A4 용지 3장이나 되는 이사 경력이 부끄러웠다. 자책감에 가슴이 뜨끔하기도 했다.

아내만 혹사시킨 것 같은 죄책감에 저려오는 아픔이 내 전부가 되는 것 같았다.



이사할 때마다 그 많은 서가의 책이며 이삿짐 싸는 것부터 이사 후의 뒷정리를 아내가 전담하다시피 다했기 때문이었다.

이삿짐 전문센터에 부탁했으면 짐 싸는 것부터 이사 후의 뒷정리까지 아내가 그 고생을 안 했을 텐데, 부족한 살림에 돈 몇 푼 아낀다고 그걸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사를 할 때면 아내는 1개월 전부터 인근 슈퍼나 가게에 가서 그 숱한 나면 박스나 사과 박스를 얻어다가 서가의 책부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책이 좀 많았기 때문에 꾸려 놓은 책 박스가 무려 100 상자가 넘을 정도였다.

나는 그 알량한 고3 담임을 한답시고 새벽밥 일찍 먹고 출근하여 야간 자습지도까지 끝나고 밤늦게야 돌아왔다. 그 바람에 이삿짐 싸고 꾸리는 것은 아내의 전담 몫이 되었다.

이같이 나는 이사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 아내는 얼마나 어려웠으랴!

그런 아내가 지금 곁에 있어 준다면, 마음이 덜 무겁고, 잘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도려내는 아픔은 아니었을 텐데 … !

지금 나는 주민초본 속의 주소 변동을 반추(反芻)해 가며 아내의 고생했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

정작 잘못한 것을 반성하며 죄스러운 마음으로 얼룩진 마음을 달래고 있다.

아무리 숨을 가다듬어도 진정이 안 되는 울적한 마음에 마냥 가슴 아파하고 있다.

무너져 내리는 가슴에 범람하는 회상의 봇물은 막을 수 없으니 이 어찌해야 좋다는 말인가 !

집필할 때마다 밀회로 만나는 컴퓨터 곁의 사진 속 여인이 오늘도 날 울리고 있다.

결혼 2주년 때 찍은 사진이지만 아내는 늘 다소곳한 모습으로 아는 체를 해주고 있다.

시집간 딸애한테 사정하여 딸애 앨범에서 가져온 흑백 사진 한 장 !

어렵게 가져온 달랑 남은 사진 한 장 속의 여인 - 아내 - 이 주민초본 속의 이사 경력 한 줄 한 줄의 주인공으로 가슴을 이리도 무겁게 누르고 있다.

"있을 때 잘 하지!"라는 짤막한 그 한 마디가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

보통사람이라면 자신이 취사선택한 택지에 정착하여 안주(安住)하기를 좋아한다. 세속에 묻혀 울고 웃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정상적인 갑남을녀(甲男乙女)라면 이사 자주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리라.

나도 그런 부류 중의 한 사람이다. 지금 살고 있는 갈마아파트를 내 집으로 만들기기까지 무려 31번이나 이사를 다닌 셈이다.

집 한 칸 마련할 돈이 없어 72년부터 93년까지 이사를 다닌 것이 31번이나 된다니, 강산이 2번 바뀌는 세월에 1년 2번 가까운 이사를 한 셈이다. 집 없는 약자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그저 잘 참아 주고 슬기롭게 대처해 준 아내에게 마냥 감사하며 사죄하는 마음뿐이다.

집주인의 방 비워 달라는 갑질 행세에도 항변이나 투정 한 마디 없이 한여름 삼복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이삿짐을 싸던 그 아내가, 어찌 그리 존경스럽고 위대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런 아내가 지금은 세상 가장 먼 곳에 가 있다니, 미어지는 가슴에 그저 먹먹할 따름이다.

이삿짐 싸는 아내 모습이 주민등록 초본 주소 변동에 오버랩되어 나타나고 있다.

땀방울로 얼룩졌던 얼굴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 아내의 모습과 꾸려놓은 여기 저기 책 박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니, 바보스런 우매한 자의 사무친 보고픔이니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많은 이사를 다닌다는 것이 보통사람으론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7남매의 장남으로 물려받은 숙명적인 가난 때문인지 아내를 평생 고생만 시켰다.

발령받은 초임지 덕산에서 우리는 부부 연을 맺은 후에, 허리띠 졸라매는 근검절약으로 살았다. 몇 푼 안 되는 교사 봉급을 모아 내 집 만들어 살 욕심으로 발버둥 치며 살았다. 그렇게 많은 이사를 하는 동안에 아내를 이사 전문가로 만들었으니 죄인의 참회 같은 뉘우침밖에는 없다.

숱한 고생 다해가면서도 바가지 한 번 안 긁던 아내 모습이 새삼 눈에 밟힌다.

그 많은 이삿짐 다 싸가면서도 얼굴 한 번 붉히는 일 없이 모나리자 미소를 잃지 않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착했던 남매의 엄마가 보이는 것 같다.

아내는 7남매의 장남 며느리로 궂은 일만 하다 간 삶이어서 마음이 더욱 아프다.

아내는 이 바보남편의 배우자로서, 남매의 엄마로서, 7남매의 형수와 어머니가 되어 1인 3,4역을 하다가 평생 생일 한 번 없이 소풍 왔다 가는 사람처럼 가 버렸다.

주민초본이 반성문을 쓰게 하다.

아내는 소풍 왔던 인생길 못 다한 얘기를, 땀의 흔적 주민초본 주소변동을 통해, 이 바보 서방님을 깨우치고 반성하게 하고 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격이지만 덕분에 늦게나마 깨달음이 내 몫이 되었다.

주민등록 초본 이사 횟수를 보고 반성문 쓰는 심정으로 새로운 삶을 다짐해 본다.

깨달음과 새로운 다짐이 무디지 않게 살게 하시고, 아내한테는 위로가 되게 하소서.

숨 붙어 있는 그날까지 항상 깨어 있어, 우매함이 살을 저미는 무기가 되지 않게 하소서.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210-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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