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진단타려도'에 담긴 제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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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진단타려도'에 담긴 제왕학

양동길 / 시인, 수필가

  • 승인 2020-09-11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일반인보다 좀 탁월한 업적이 있다 싶으면 뭔가 신비로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일까? 놀랄만한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기리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존경심의 발로일까? 이야기 속 사건이나 인물이 조각상이나 그림으로 후세에 전해지기도 한다. '고사 인물도'도 그중 하나이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보는 이가 섬뜩해지는 불후의 자화상으로 잘 알려진 윤두서(尹斗緖, 1668 ~ 1715, 조선 문인화가) 작품 중에도 여러 폭의 고사 인물도가 전한다. 진단타려도(陳?墮驢圖, 비단에 채색, 110.9×69.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감상해보자.

우선 문인화가가 잘 쓰지 않던 청록기법 사용이 눈에 띈다. 굳이 따지자면 수묵담채 바탕에 채색을 더한 소청록법이라 할 수 있다. 석록 색점으로 반짝이는 효과도 냈다. 덕분에 그림이 더욱 화사해 보인다. 기쁨에 충만한 내용이 돋보이도록 배려한 모양이다. 등걸이 비비 꼬인, 고목이 즐비한 숲사이로 잘 닦인 넓은 길이 휘돌아 나온다. 나귀 타고 길 가던 선비 복색 사람이 당나귀 등에서 떨어지는 모습이다. 떨어지며 낭패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지 않은가? 외려 시동이 가지고 있던 책과 두루마리가 가득한 보따리를 팽개치고, 화들짝 놀라 달려든다. 스쳐 지나던 사람은 여유만만 따라 웃고 있다. 화면 왼쪽 윗부분을 비워두었고, 거기에 어제시가 쓰여있다. 끝에 적힌 乙未(1715) 仲秋(8월) 上浣(상순)과 낙관 '신장(宸章)'이란 관지(款識)로 보아 재위 41년 숙종 친필이다. 처음부터 임금이 감상하는 어람(御覽)용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왜 윤두서가 이 그림을 그려 올렸을까? 의도나 경과가 알려진 바 없다. 오히려 시대 상황이나 윤두서의 처신, 눈이 나빠졌던 당시 그의 상황으로 보아 윤두서 작이 아닌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 나뭇잎, 돌 등 묘사 기법이 여타 윤두서 작품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인공이 그의 자화상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풍성한 얼굴, 봉황눈과 눈썹, 위엄있는 턱수염 등 윤두서 자신의 모습 그대로여서 윤두서 작이 틀림없다는 견해도 있다. 왕의 특별한 요청으로 그림 제작에 임한다면 평상시와 다른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양동길
윤두서 작 '진단타려도'(陳?墮驢圖, 비단에 채색, 110.9×69.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내용은 희이 진단(希夷 陳?, 872 ~ 989, 중국 오말송초의 도학자)에 얽힌 고사를 그린 것이다. 진단은 70여 년 군웅이 난립한 중국 오대십국 혼란기를 은거하여 도 닦으며 살았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주역과 성리학에 밝아 참된 제왕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여러 차례 군주가 바뀌었으나, 모두가 그의 눈엔 재목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한 진정한 황제 재목은 조광윤(趙匡胤, 927 ~ 976, 송태조) 뿐이었다.

진단이 나귀 타고 개봉(송의 수도, 지금의 하남성)으로 가던 길에 행인으로부터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너무 좋아 박장대소(拍掌大笑)하다 나귀 등에서 떨어진다. 좋아 어쩔 줄 몰라 활짝 웃는 모습 그대로, 떨어지는 것은 괘념치 않고 "이제 천하는 안정되리라(天下自此定矣)"라고 외쳤다 한다. 세상일 먼저 걱정하고 자기 자신 일은 뒤로 미루는 선비 정신이 은연중 그대로 표출된 것이다.

진단의 판단이 그르지 않아, 주광윤은 주변에 난립한 소국 정벌로 통일 대업에 힘쓰는 한편, 민정, 병정, 재정의 3권을 중앙에 집중시키고, 문치주의를 확립하여 300년간 이어지는 송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중국 역사상 덕망이 넘치는 명군 중 한 사람이다. 야영장에서 부하들이 술에 취한 주광윤에게 황포를 입힘으로써 추대되어 가장 적은 희생으로 황제에 올랐다. 당시 주광윤은 후주(後周) 근위군 총사령관이었다. 사대부 및 언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사람을 절대로 죽이지 말라는 유훈을 남겨 송에서는 좌천, 유배는 당할지언정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전한다. 주광윤이 황제가 되어 여러 차례 진단을 찾았으나 이전처럼 그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던 주광윤이 '희이' 선생이란 호도 내렸다 한다.

윤두서의 속내를 알 길 없다. 그림으로 왕을 칭송한 것인지, 왕에게 무엇을 요청한 것인지, 왕을 일깨우려 한 것인지. 미루어 생각해 본다. 그림을 화사하게 그린 것은 태평성대를 희구해서가 아닐까? 떨어지는 진단의 얼굴을 자기 얼굴 모습으로 그린 것은 자신도 진단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결기를 보인 것 아닐까? 당시 숙종은 끊임없는 환국 정치로 수많은 선비의 희생을 불러왔다. 군왕은 오로지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진단의 제왕학을 요청한 것은 아닐까?

숙종은 그림에 자신이나 나라를 투영해 보지 않았나? 윤두서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렇게 감상을 적었다. "희이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다.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걱정 없으리라.(希夷何事忽鞍徙 / 非醉非眠別有喜 / 夾馬徵祥眞主出 / 從今天下可無?)"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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