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한결같은 마음,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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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한결같은 마음,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 승인 2020-09-04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우리는 24시간 늘 어떤 대상을 만난다. 느낌 없이 지나치거나, 일상적인 일도 문득 공감 상대로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자신의 상태에 따라 깨달음이 되기도 한다.

조선 정조대왕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왕권은 급격히 약화 된다. 왕권뿐 아니라 문화예술을 비롯한 각종 사회제도가 퇴보의 길을 걷는다. 결국, 나라가 망국으로 치닫는다.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즉위한 순조는 11세였다.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 빌미가 된다. 하지 않은 것인지, 못 한 것인지 왕은 거개 한 일이 없다. 3당이 어우러졌던 탕평 정부는 해체된다. 친위 부대였던 장용위(壯勇衛) 혁파를 시작으로 군도 와해 된다. 대동법, 균역법, 서얼허통(庶孼許通)과 통공정책(通共政策) 등 선대 왕들의 개혁 의지가 담긴 정책도 모두 유명무실해진다. 국가 경영에 대한 책임의식 또한 아무도 갖지 않는다. 피폐한 삶에, 조세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 가혹한 수탈로 백성은 생사의 갈림길에 내몰리게 된다. 기본이 무너지면 재해도 따르는 것일까, 각종 재해도 이어져 온 나라가 탄식 소리로 넘쳐난다.

세한도
김정희 필 세한도, 1844년, 세로 23㎝ × 69.2㎝,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이런 난국에 등장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다가 간 사람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 1856, 문신, 실학자, 서화가)다. 단순한 예술가요 학자가 아니라, 신지식인의 기수였으며 이 땅에 새로운 문화 전개를 가능케 한 선각자였다.



김정희가 모든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어 있던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가 《세한도》이다. 1844년 작으로 국보 제180호다. 9년간의 제주도 유배는 고금도에 이어 두 번째다. 훗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기도 한다.

당시엔 죄인과 관계 가지면 같은 죄로 벌 받기 일쑤였다. 죄인의 시신 수습이나 수발들기와 같은 일은 목숨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 시국에서도 김정희 문인으로 사제 간 의리를 지킨 사람이 이상적(李尙迪, 1804 ~ 1865, 역관, 문인)이다. 이상적도 시를 잘 썼다. 스승과 같이 골동품, 서화, 금석에도 조예가 깊었다. 역관으로 중국에 12번 다녀왔다. 당대 저명한 중국 문인들과 교류, 나름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어 그곳에서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한다. 수집한 귀한 책을 두 번이나 김정희에게 보내 준다. 발문에 의하면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藁>, 우경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이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다. 이상적 또한 스승의 그림을 받고 감동하였던 모양이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歲寒圖一幅 伏而讀之 不覺涕淚交)"로 시작하는 답장을 쓴다. 《세한도》를 북경에 가지고 가, 청나라 문사 16명의 제찬(題贊)을 받기도 한다. 뒷날 그림을 소장하였던 김준학(金準學)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가 된다.

《세한도》는 두말이 필요 없는 조선의 대표적 문인화다. 문기(文氣)와 사의(寫意)가 충만하여 시서화가 하나 된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준다. 집 앞뒤에 소나무와 잣나무 두 그루씩 갈필로 그렸다. 우측에 화제(畵題)와 관지(款識)가, 좌측에 꽤 긴 발문이 적혀있다. 권세와 이익만 따르는 세태를 비판하고, 그에 초연한 제자의 한결같은 마음과 인품을 칭찬하는 가운데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한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세한도라는 말도 여기에서 따왔다. 곧은 지조와 절개, 변함없는 한결같은 마음이다. 제자의 마음이면서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최근 몇몇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세한도》가 국민 품에 안기게 됐다는 소식이다. 반가움에 그림에 얽힌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왔다.

《세한도》는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 김병선과 그의 아들 김준학으로 전해졌다가, 한 말 권세가 민영휘 집안으로 넘어간다. 민영휘 아들 민규식이 소유했다, 경성제대 교수였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가 수집해 일본으로 간다. 서예가이며 컬렉터였던 손재형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1944년 한국에 돌아온다. 손재형이 정치 일선에 나서면서 이근태에게 저당 잡힌다. 다시 개성 갑부였던 손세기가 소유했다가 아들 손창근에게 물려준다.

그 과정에서 추사의 학문과 예술에 매료되었던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는 《세한도》를 한 푼도 받지 않고 되돌려주며, 그의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부친이 수집했던 추사 친필과 관련자료 2700여 점을 과천시에 기증했다. 돈으로 바꾸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료실에 써달라고 200만 엔을 기부했다 한다. 마지막 소유자였던 손창근은 시가 1000억 원에 달하는 경기도 용인 땅을 국가에 내놓았고, 수집한 컬렉션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조건 없이 기증했다 한다.

그림의 내용만큼이나 품위 있는 처신이 깊은 울림을 준다. 절의 지조만큼이나 문화재 사랑도 한결같다. 명품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에 의하여 지켜진다. 스스로 명품이라 해서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니요, 강요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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