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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오랫동안 라면을 더는 먹지 못했다. 라면은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의 맛이었다. 4학년 때던가. 우리 집엔 TV가 없어 나와 언니는 저녁만 먹으면 옆집으로 달려갔다. 동네에서 좀 산다 하는 그 집은 바로코 스타일의 디자인에, 미닫이 문이 달린 TV를 일찌감치 장만해 부를 과시했다. 뻔질나게 드나들어 그 집 사람들 눈치가 좀 보였지만 우리는 TV 드라마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일일 드라마였는데 도시 변두리에 사는 소시민들의 얘기였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형한테 동생이 "형, 오늘 저녁은 라면 안 먹어도 돼. 밥 먹을 수 있어"라며 좋아라 했다. 내가 꿈에서도 먹지 못하는 라면을 지겨워하는 형제가 어린 나로선 이해가 안됐다.
고등학교 때 대학 다니는 언니와 자취하면서 라면을 원없이 먹었다. 주말마다 특식으로 먹었는데 네 개를 끓였다. 겨울엔 떡국떡도 넣었다. 80년대부터 라면은 부흥기를 맞았다. 라면 종류가 다양해졌다. 너구리, 안성탕면 등 신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컵라면은 라면계의 혁명이었다. 내가 고3때 농심에서 '사발면'으로 처음 출시됐는데 어디서나 간편하게 뜨거운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고, 가늘고 꼬들꼬들한 면이 특이했다. 수업시간만 되면 잠귀신이 붙은 것처럼 졸다가도 도시락 먹고 후식으로 사발면 먹을 땐 눈이 반짝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무수히 먹은 라면이지만 잊을 수 없는 라면이 있다. 어느 해 5월 태안 해변길을 종일 걸었다. 고운 모래밭과 들꽃이 예뻤다. 소금기 머금은 서풍을 맞으면서 걸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간식거리로 싸온 떡과 과자도 먹었다. 해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릴 무렵, 배가 고파 식당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가도 가도 식당은 없었다. 허기지다 못해 식은땀이 나고 손이 떨렸다. 빨리 뭘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언덕길을 올라 마을에 들어서자 마당에서 세차 중인 노인이 보였다. 배를 움켜쥐고 근처에 식당이 있는지를 물었다. "시골 마을에 무슨 식당이 있겠소. 밥은 없고 찬장에 라면 하나 있는데 끓여 먹어요. 난 세차 중이라서."
주방에 가서 재빨리 라면을 끓였다. 내 집인 양 냉장고를 열고 겉절이도 꺼내 식탁에 놓았다. 뜨거운 김을 들이마시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라면을 먹어치웠다. 적당히 익은 배추겉절이와 라면이 찰떡궁합이었다. 국물까지 다 마시고 겉절이도 싹 비웠다. 비로소 살 것 같았다. 신바람 나게 설거지를 해 놓고 마당으로 나갔다. 어르신에게 이렇게 맛있는 라면은 처음 먹어본다며 수다를 떨었다. "어이구, 배고프니까 맛있지 뭘. 껄껄." 알고 보니 그 집은 별장이었다. 어쩐지 살림이 단출했다. 서울에 사는 노신사는 가족과, 때론 혼자 별장에 내려와 낚시도 하고 쉬었다 간단다. "태안 놀러오면 여기서 묵고 가요. 열쇠는 현관 옆 창문 틈에 있으니까." 생면부지의 이방인에게 이토록 호의를 베풀다니, 어르신이 보여준 나에 대한 믿음에 가슴이 뭉클했다. 라면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염천에 뜨거운 라면을 후루룩거리며 시큼한 총각김치와 먹는 맛도 끝내준다. 나중에 찬밥 말아먹는 것도 필수!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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