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섭 교수 |
인간이 정착생활을 하면서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하는데, 빗물과 눈이 쌓이지 않도록 지붕 모양은 뾰족하게 만들고 벽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공간에 빛을 들이기 위해 창문을 뚫게 되었을 것이며, 먹을거리를 요리하고 따뜻하게 공간을 데우기 위해 집 안에서 불을 때다 보니 굴뚝을 세우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굴뚝이 있는 뾰족지붕과 네모난 창문이 집에 대한 원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된 도시에 대량으로 집을 공급하기 위해 철골로 집을 짓는 실험이 전개되었다. 철골은 대부분 표준화된 크기로 현장 조립식으로 빠른 시간에 집을 지을 수 있는 장점이 많았다. 정부도 이를 독려하기 위해 정책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건축가도 혹여 디자인이 저급해지지 않도록 형태에 공을 들였다. 그런데 막상 철골주택이 시장에 나오자 반응은 싸늘했다. 사람들은 경제적이고 가벼운 철골주택이 아니라 눈으로 보기에도 더 묵직하고 튼튼해 보이는 콘크리트 집을 선호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당연히 철골이 벽돌이나 콘크리트보다도 더 강한데도 말이다. 그만큼 집에 대한 뿌리 깊은 원형은 바뀌기 쉬운 것이 아니다.
어떤 집에 살 것인지를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낭만적인 바람과 실제적인 이득 사이에서 고민한다. 예쁜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어도 잡초를 뽑는 일이 힘들고 편의시설이 멀다는 이유로 결심을 주저하거나, 마음에 드는 아파트가 있어도 가격이 더 오를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기꺼이 포기한다. 하물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현하고 싶어 하는 건축가들도 대부분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한다. 살고 싶은 집과 동네가 있어도 기대되는 다른 가치를 위해 현재의 곳에서 견디며 사는 꼴이다. 무엇 때문에? 대부분은 돈이 그 이유이다. 집을 생활을 위한 삶의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 사고 팔 수 있으면서도 차익을 최대한으로 실현할 부동산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부동산은 돈의 논리로 부르는 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쁘고 아름다운 집과 동네를 꾸미는 일이 쉬이 추진되기 어렵다. 임시로 생각하는 공간에 누가 정성을 들이고 마음을 붙일 것인가? 그런 이유로 오랜 세월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던 집들이 쉽게 헐렸다. 이층집의 아기자기했던 대전프랑스문화원 건물이 멋없는 5층짜리 원룸으로 바뀌었고, 목척교 옆 추억의 신도극장은 7층짜리 무인모텔로 변신했다. 비교적 저렴하기에 사람이 몰려 명소가 된 건물들도 개발 바람이 불면 여지없이 스러진다. 아름드리 가로수와 키 재기를 하는 오래된 아파트단지도 곧 있을 재건축을 기다리며 아무도 가꾸려 들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의 용적률에 재산가치가 얼마나 늘어날 것인지만 몰두한다.
부동산 광풍이 수도권의 일일 것이라고만 알았는데 우리 지역으로도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올랐다는 얘기들이 무성하더니 급기야 투기과열지구로까지 지정되었다. 걱정의 소리도 있지만 속으로 흐뭇해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염려되는 것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환경을 개선하고 진정한 장소적 가치를 높이는 노력이 멈칫거리기 쉽다는 것이다. 너도나도 개발이익에만 몰두하여 보상가에 대한 기대치만 높이고 공공성과 장소성에 대한 고민의 목소리는 잦아들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재생이란 이름으로 우리 지역 곳곳에서 장소를 회복하고 잊힐 뻔한 가치를 되찾고자 하는 노력이 살아나고 있다. 이런 희망에 부동산 열풍이 찬물을 끼얹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부동산이기에 앞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야 할 보금자리라는 사실을 다시 새겨보자.
/송복섭 한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