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변화가 가득 담긴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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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변화가 가득 담긴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

양동길 / 시인, 수필가

  • 승인 2020-08-28 11:28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 15(1791)년 천주교(邪學이라 명명)가 처음 등장한다. 사람은 무슨 일이고 오래 겪다 보면 지루함을 느낀다. 게다가 사대부 못지않은 교양으로 중무장한 중인이 대거 등장하고 서학이 암암리에 번지면서, 당시 조선 사회는 주자학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1794년 청나라 주문모(周文謨, 1752 ~ 1801)신부가 입국하면서 교세가 급격히 확대된다. 천주교는 가부장적 권위나 유교적 의식을 거부, 주자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의 위협적 존재였으나 정조는 관대했다. 자신감이 넘쳤다. 사직 상소를 올린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 조선 문신)을 벌하고 천주교 무리를 엄벌하라 아뢴 우의정 이병모(李秉模, 1742 ~ 1806, 조선 문신)에게 이른다.

"그는 바야흐로 움추려 있던 벌레가 우레 소리를 듣고 절명한 듯하다가 다시 소생한 것과 같으니, 그 한창 자라는 가지를 꺾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서 하필이면 이와 같이 해야 하겠는가. 사학의 폐단은 일찍이 좌상(左相)을 대했을 때 이미 말하고 바로잡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는 형법(刑法)으로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긴다. 태양이 떠오르면 반딧불과 횃불은 저절로 빛을 잃게 되며 원기(元氣)가 충실하면 외기(外氣)는 침범하지 못하니, 만약 내수(內修)와 외양(外攘)을 잘하여 먼저 근본을 다스려 시례가문(詩禮家門)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고가(故家)의 유풍(遺風)을 지키고 예교(禮敎)의 모범을 잃지 않게 한다면 저들 역시 앞으로 없어지기를 기약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 조선왕조 정조실록 정조 21(1797)년 6월 24일 계사 2번째 기사.

변화를 우매한 것으로 어여삐 여긴다. 태양에 반딧불이나 횃불은 절로 빛을 잃는 것이라며, 정도가 아닌 것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니 형법으로 다스릴 이유가 없다 한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의 지나친 견제로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박해를 받는다. 1만여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산된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판단이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도도히 흐르는 물길은 누구도 막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이때는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이다. 변화를 외면하거나 두려워하고, 안주하려 하면 할수록 변혁의 물살은 더욱 강력해진다. 그림으로 그 변화를 읽어보자.



김홍도
김홍도의《병진년화첩》 중 <소림명월도>, 1796년, 종이에 수묵담채 26.7×31.6cm, 호암미술관 소장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 ~ 1806, 조선 도화서 화원)의 작품을 살피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그림이 있다.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이다. <소림명월도>가 실린 《김홍도필병진년화첩(金弘道筆丙辰年畵帖)》은 김홍도가 1796년 봄에 그린 화첩으로 A4보다 약간 큰 크기(26.7×31.6cm)이다. 20점을 묶었는데 50대 작가의 완숙한 경지가 담겨있다. 산수화, 산수인물도, 화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근경 위주의 구도와 담채, 독특한 준법(?法)과 수지법(樹枝法) 등 김홍도만의 화법이 읽힌다.

그림 그리다 보면 소품이라고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작가의 의도를 살리기가 오히려 더욱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림명월도>는 개울물이 졸졸 흐르는 성근 숲 사이로 달이 세상을 훔쳐보는 그림이다. 특정하기 어려운 잡목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우리 시골 뒷동산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 연유로 다정다감하게 다가온다. 이상 세계나 상상의 세계, 명승 절경을 골라 그리던 것과 다른 일상적 소재의 선택이 단연 돋보인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기법이 바탕이다.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실경산수화라 한다. 실경에 작가 의도가 더해진 것이 진경산수화이다. 자연 그대로가 아니면서 그대로이다. 거기에 작가의 심상이 더해있다.

한적한 시골 밤길을 걸어 보았는가? 알아서 따라나선 달이 줄곧 밤길을 밝혀준다. 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달리 보인다. 쓸쓸함과 신비로움, 고고함과 한적함, 따사로움과 차가움, 다정함과 그리움이 공존한다. 서로 탓하거나 등지지 않는다. 금방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수많은 별과 더불어 벌리는 하염없는 수다를 모두 들을 수 있는가? 자신도 모르게 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림 역시 별 것 없으면서 보는 이를 무한한 감성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인 묵의 농담으로 원근을 처리하였다. 앞으로 올수록 점점 묵의 농도를 짙게 하였다. 흑백 대조가 강할수록 앞으로 튀어나와 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동양화는 평행원근법(다시점)을 사용하여 그림에 초점이 없다. 이 그림은 단일시점이다. 원근법 변화가 여타 그림과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화폭에 넘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 수작임을 직감케 한다. 십여 그루의 나무가 전부지만 숲과 수많은 이야기가 어둠에 숨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 또한 오늘날의 창작기법과 일맥상통한다. 소박하지만 변화가 가득하다.

김홍도의 눈이나 작품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창작의 세계는 각기 다른 저마다의 세상을 자신만의 몸짓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제일 소중한 가치이기도 하다. 또한, 저마다의 시점이 있다. 그것이 모여 시대정신이 된다. 그를 바로 보아야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겠는가?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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