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폭포의 시원한 물줄기/영동군 제공=연합DB |
구름 타고 달을 등진 대금 연주자가 옥계폭포 표지석 높이 앉아 정겹게 맞이한다. 이른 시간이라서일까,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폭포로 향한 출입구에 탁상이 덩그러니 서 있고, 어김없이 손 소독제 2통이 놓여있다. 우렁찬 폭포 소리에 마음이 후련하다. 여름 폭포는 수량이 많아서 좋다. 계곡이 깊지 않은 우리 영토 특성상 사시절 변함없이 우렁우렁한 소리 듣기는 쉽지 않다. 팔각정 아래 돌아서니 물줄기와 함께 수려한 경관이 팔을 벌린다. 폭포수 아래와 돌다리를 오르내리며 하나 되려 애써 본다. 바위틈에 피어난 난에 매료되어 호를 난계(蘭溪)라 했다는 박연(朴堧, 1378 ~ 1458, 조선 문신, 악성), 그 난은 더 이상 보이지 않으나, 속되지 않은 풍광은 여전하다.
박연은 악률에 정통한 사람이다. 벼슬길에 오르기 전부터 거문고와 비파, 피리 등에 능하였다. 1405년 생원시, 141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34세 다소 늦게 관직에 진출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부터 그의 숨은 재능이 만개한다. 세종은 그를 봉상판관, 악학별좌, 관습도감 제조 등을 제수한다. 아악을 정리하여 악학궤범을 비롯한 각종 악서와 12율관, 편경 등 수많은 악기를 제작하였다. 조정의 조회때 아악을 연주하도록 하여 우리 국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예기》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이 편안해서 즐거우면 정치가 조화롭게 된다. 이 때문에 성(聲)으로 음(音)을 알고, 음을 살펴 악(樂)을 알고, 악을 살펴 정치를 알게 되어 정치의 도리가 갖추어진다." 음악을 통하여 도학을 실현하려 한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본다. 박연 혼자 모든 것을 이루어 낸 것은 아니다. 음률에 뛰어난 맹사성, 악사 정양이나 악기제작자 남급 같은 사람이 곁에 있었다. 거기에 자신을 알아주는 인군이 있었다.
그들뿐이 아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세종조에는 조정에 인재로 가득했다. 성삼문과 같은 집현전 학사, 이천이나 장영실 같은 기술자, 황희 같은 어진 정치인, 최윤덕이나 김종서와 같은 명장이 먼저 머리를 스친다.
세종조에만 유달리 인재가 많았을까? 그럴 리 없다. 동서고금 인적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애민의 진정성이다. 진정 백성을 사랑한 탓에 모든 행동이 저절로 일어난 것이다. 한글 창제가 그렇고 각종 기후 예측 장비가 그렇다. 고통과 어려움이 가슴을 흠뻑 적신다. 둘째로 통찰력과 창조 습관이다. 생각하고 느끼기만 한들 무엇하랴. 해결하려는 적극적 의지가 있어야 한다. 문제를 파악하는 통찰력이 있어야 창작이 이루어진다. 또한, 그를 해 낼 수 있는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인사가 만사 아닌가? 적재적소에 인재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좋은 결과 얻기는 난망이다. 셋째는 탁월한 리더십이다. 아무리 좋은 견해가 있더라도 도출시키지 못하고 그를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어야 최상의 결과가 생성된다.
세종은 만나는 사람마다 인정하여 긍지를 갖도록 했다. 자신의 창의력과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열정이 불타오르게 멍석을 깔아준 것이다. 창의력은 자유분방한 가운데 도출된다. 열정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긍지가 있을 때 마음이 살아 움직인다.
동색인 사람끼리 모이면 창의력은 작아진다. 세종조에도 긍정 세력만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최만리같이 한글 창제를 반대한 사람도 있었고, 기술인력인 중인을 여전히 우습게 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사건건 시비에 시달리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모든 사안과 의견을 경청했음을 알 수 있다. 강제하지 않고 간쟁을 즐겼다. 참찬 허조의 상서에 대한 답변이다. "경의 뜻은 알았으나, 한 사람 말만으로 결정할 수 없으니, 삼의정과 변참찬에게 다시 의논하라(已知卿意, 然不可以一人之言定之, 其與三議政,卞參?更議.-세종실록 16권, 세종4년 5월 28일)" 이러한 의사 소통은 실록에 수도 없이 나온다. 변증법의 정반합 원리와 같은 논법을 치세에 적극 활용했다. 정반합을 반복하다 보면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것 아닌가?
영동 심천 고당리 입구에는 밀양박씨 사당인 세덕사, 박연 사당 난계사, 향토민속자료전시관, 난계국악박물관 등이 있다. 국악체험촌에 들어서면 난계국악단, 박연묘소, 난계 영정을 모신 제실 경란재, 공연장인 우리소리관, 숙박 시설인 국악누리관, 악기제작 및 연주 체험장 소리창조관, 천고각 등이 있다. 이곳에서 가을엔 난계국악축제가 열린다. 영동은 포도, 감, 호두, 사과, 배 등 과일 명산지이기도 하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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