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밀집을 극복하고 기능 분산을 촉구하는 중도일보 1966년 8월 '비좁은 서울' 기획 시리즈보도. |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의 백지계획과 1971년 김대중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의 대전 행정부 수도 공약보다 앞선 1966~1967년 중도일보의 '대전 천도를 제안한다', '비좁은 서울'의 야심찬 보도가 이러한 행정수도 조성에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
1966년 5월 27일 중도일보는 1면에 '대전 천도를 제안한다'라는 기사를 내걸고 서울에 밀집한 행정기능을 분산할 것을 촉구했다.
54년 전 기사에서 중도일보는 60만 수용 능력으로 계획된 수도 서울이 인구 380만 명을 넘어선 과밀한 도시가 됐으며 복합한 교통난과 주택난 상수도난을 겪으며 산업, 경제, 문화에서 지방분산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았다.
제주도에서 신의주까지 중심지역이면서 교통이 편리한 대전 유성 근방에 반경 59리(23.1㎞) 신도시를 건설한다면 6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건설이 가능할 것이라는 포부를 제안했다.
특히, 중도일보는 일회성 보도에 그친 게 아니라 좌담회와 기획 시리즈, 사설을 통해 서울이 당면한 한계와 분산 필요성을 뚝심 있게 역설했다.
1966년 7월 31일자 '정부청사 대전유치를 말한다'라는 기사는 1개 지면 전체를 할애해 천도를 주제로 한 좌담회 토론내용을 중개했다. 임지호 2대 대전시장과 충남대 지헌영 교수, 유원동 충남대 문리대학장 등이 참석해 밀집한 서울의 한계를 분석하고 정부청사 분산이 필요한 과학적 이유를 토론했다.
1966년 7월 27일 오후 2시 중도일보 회의실에서 이웅렬 사장과 임지호 대전시장, 지헌영 충남대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청사 대전유치를 말한다' 좌담회가 열렸다. 지면은 본보 1966년 7월 31일자. |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모든 게 초포화 상태이고 불건전한 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현 서울에다 더 이상 손을 대지 말고 광역도시건설에 최적지라고 할 수 있는 대전에 후보지를 선정하는 영단을 내리라"고 역설했다.
중도일보가 서울 밀집 기능분산을 촉구한 1966년 시대 상황을 보면 수도 서울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며 주택난과 교통난, 그리고 상하수도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마침내 정부는 정부청사를 한강 이남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후보지를 물색 중이었으며,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새 행정수도 구상을 발표했다. 중도일보는 이때 서울을 확장할 게 아니라 행정부처를 지방으로 이전해 분산하자는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한 것이다.
압권은 1966년 8월 26일부터 시작한 중도일보의 '비좁은 서울' 시리즈 기획보도였다.
중도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충남대 국문과 교수 등을 지낸 장암 지헌영 선생이 여섯 차례 보도를 통해 새서울 구상은 미봉책에 불과함을 지적하고 인문·지리·자연적 요건을 감안했을 때 대전 유성으로 정부기관을 옮길 것을 주장했다.
중도일보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67년 7월 22일 사설 '정부청사의 대전이전' 그리고 관련 기사 '철도청 등 대전 유치를 호소', '1일 수도? 대전에 모인 행정 수뇌부' 등의 보도를 이어갔다.
1967년 7월 7일자 보도에서는 "날로 폭주하는 서울의 현실에 비추어 정부청사의 대전유치가 필요하다는 위정자의 결론이 멀지 않아 나오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는 역사의 당위성"이라고 주장했다.
중도일보가 앞장서 걸어간 충청권 행정수도를 향한 발걸음은 눈 위에 발자국이 되어 1997년 정부대전청사가 준공해 11개 청 단위 중앙행정기관이 지방으로 이전하는 쾌거를 이뤘다.
또 2003년 12월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을 내용으로 한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결실을 맺었다.
2004년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위헌 판결 직후에는 "행정수도 사수 500만 충청인 나섰다" 등의 보도를 통해 국민적 열망을 전달했고, 당시 정운찬 국무총리의 행정수도 수정안 발표에 '총리해임안 세종시 정국 쟁점부상' 등의 보도를 이어갔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