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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식 한양대 특임교수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나치가 저지른 인종 대학살의 주범중 하나인 아이히만의 재판 참관기로서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한나 아렌트의 대표적 저서이지만 부제인 악의 평범성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대량학살의 책임자로서 종전 후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교수형이 선고된 아이히만의 재판기록이 책의 주 내용이다. 재판참관기록을 통하여 만나는 아이히만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의 모습이었고 대중이 기대했던 악마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악의 평범성은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악마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상황과 조건에 의하여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악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섬뜩한 진실을 솔직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히만은 사회심리학연구를 위한 유명한 실험의 제목으로 다시 한번 세상에 등장하게 된다. 1960년대 중반 예일대학의 스탠리 밀그램 교수의 실험에 참가한 실험자는 실험을 계속 진행하면 피실험자인 상대를 죽음에 처하게 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여서도 스스로 실험의 진행을 거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질 사람은 따로 있다는 실험담당자의 설명을 그대로 믿고 실험을 계속 진행했다는 점이다. 아이히만 실험의 결과는 인간의 본성과 선악의 결정에 관한 양심의 자유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가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양심의 자유를 인간의 고유권이며 박탈 불가능한 기본권으로 인지하고 있으나 책임소재가 명백하지 않을 경우 사람은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등 양심에 근거한 자제심과 분별력 행사의 기회조차도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며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자체를 기피하거나 버거워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조직이 복잡하고 책임한계가 모호하며 분업화가 정착된 관료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될수록 이런 경향이 일반화. 보편화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하고 있다. 책임전가나 책임회피에 유리한 관료제의 지배에서 비롯되어 누구도 책임지거나 책임지려하지 않는 무책임의 시대가 도래하여 마침내 인류문명은 또 다른 홀로코스트의 시대로 무책임하게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히만은 그의 재판에서 홀로코스트같은 인종학살의 책임에서 관계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책임소재가 애매하게 분류된 역할체계를 구축하도록 애썼다고 증언했다. 아이히만의 실험결과는 방대하고 복잡하며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현대사회조직의 특성상 우리가 그토록 강조하고 숭상하는 양심이나 분별력, 정의와 질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우려를 키운다. 오히려 책임한계의 모호성과 애매함, 어떤 최악의 결과가 나와도 나와는 관계없다는 무개념의 타성과 관행이 도도한 흐름이 되어 모두를 도덕적 타락과 가치의 혼돈으로 내몰아 마침내 정의가 사라지고 양심의 권능이 실종되어 공멸의 길에 이르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감지되고 있다. 공정한 사회의 깃발이 퇴색되고, 진영논리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지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며 이를 토대로 올바른 역사진행의 방향과 역할을 제시하고 모색하는 깊이있는 사유의 시간은 사라지고 있다, 특히 군중심리에 취한 집단적 의사표현에 무분별하게 가담하는 행위는 우리사회의 존립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평범한 누구라도 인류전멸의 대재앙을 자행하며 우리의 미래와 희망을 망가뜨리는 평벙한 악을 실천할 수 있다는 아이히만의 교훈이 우리 시대를 인도하는 새로운 반증의 등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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