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학생 영화의 배우는 교내에서 마스크만 맞는 아무나를 쓰는 게 대부분이다. (이것도 온갖 인맥을 다 동원해야 될까 말까 한 게 현실이지만) 그런데 이번 연출은 좀 달랐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학생 나부랭이들의 영화일지라도 진짜 배우를 원했던 것. 마스크에 연기까지 보겠다는 심사였다. 당연히 비현실적인 요구에 짜증이 났으나 그 요구를 수행하는 게 곧 내 역할이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냥 막무가내로 배우를 구해야했다. 그래서 왕창 뿌렸다! 영화 관련 구직사이트에 등록된 무명의 여배우들에게 영화의 기획안과 페이 조건을. '제발! 누구든! 아무나 걸려라! 아니, 걸려주세요!'라는 심산으로.
사실 그때, 좀 코끝찡한 현실에 감동했다. 필모에 과연 도움이 될까 싶은 이런 영화에 진심으로 출연하고 싶어하는 무명배우들이 넘쳐났다. 심지어 대부분 서울에 거주지를 두고 있어 포항까지 와야만 했는데도 말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앞뒤없이 열정을 쏟는다는 게 이런걸까 싶었달까.
그들은 정성스레 작성한 자기소개서와 연기영상을 내게 보내줬고, 난 그것을 연출에게 끝없이 조달했다. 그랬다. 끝없이. 그들의 열정과는 별개로 연출은 몇분만에 그들을 판단했다. 그런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희망과 위로의 말로 포장한 불합격 메일을 보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 반복되던 한날이었다. 배우가 또 킬됐다는 소식에 몇번째인지도 모를 불합격 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이런 뻘소리로 선배가 날 멈춰 세웠다. "야. 떨어졌다는 메일을 왜 보내, 귀찮게." 순간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정적. 소리없는 내 분노가 느껴졌을까. 선배가 슬쩍 자리를 떴다. 아마 그때의 난, 말 그대로 부들거리고 있었을 거다.
몇 년이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그때의 분노가 생생하다. 불합격 메일은 배우의 절박한 열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선배는 그 예의를 귀찮음으로 전락시켰다.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 열정에 기대 영화를 완성시켜야 했던 선배가 할 소린 아니었다. 그 마음이 귀한지 모르는 이 싸구려 영화엔 출연하지 말라고 광고를 하고 싶었달까.
다행히 나름의 정의구현이 이뤄지긴했다. 내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그때만큼은 선배도 조건없는 열정이 얼마나 간절했던건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결국 배우찾기에 실패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유지은 기자 yooj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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