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묵 대전세종연구원장 |
로스링이 잘못된 인식의 전형적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이 지구상의 국가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두 개 집단으로 구분하는 일이다. 세계 각국의 소득에 관한 최근 자료를 보면, 세계 인구의 75%가 중간소득 국가에 살고 있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으로 구분하기가 적절하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로 세상을 양대 집단으로 구분하는 경향을 그는 '간극 본능'이라 불렀다. 세상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50년 전쯤의 세계 상황을 기술할 때나 유용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구분을 여전히 즐겨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아직 코로나-19 사태가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사회변화를 제대로 예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충격은 대단히 크다.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아마도 서양 '선진국'이 보여준 부실한 대응 능력과 피해 규모일 것이다. 도대체 그동안 '선진국'으로 자처해온 나라 중에서 국격을 제대로 보여준 나라가 몇이나 있는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공격자인 코로나-19는 잘 사는 나라, 강대국, 복지국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뚫고 들어가 세를 확장시켰다. 방어자인 '선진국'의 경우에는 돈도, 국력도, 복지제도도 코로나-19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때문에 사회 발전에 관한 우리의 기존 관념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사실에 기반을 두고 코로나-19 앞에선 '선진국'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자. 국제통화기금의 발표에 따르면 2019년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즉 1인당 GDP 규모가 가장 큰 나라는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의 1인당 국민소득은 11만 3196달러나 된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룩셈부르크에서 지금까지 인구 1백만 명 기준으로 9508명이 감염되고, 204명이 사망했다. 다음으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보면, 인구 1백만 명당 1만 2599명이 감염되고, 445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내고 있지만, 기껏 달러로 백신을 입도선매 방식으로 선점한 것 외에 두드러진 실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로 알려진 스웨덴의 상황을 보면, 공공의료시스템도 바이러스 앞에서는 큰 힘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웨덴의 경우, 인구 1백만 명당 확진자는 7799명이고 사망자는 562명이다. 같은 방식으로 계산해 보면, 우리나라의 인구 1백만 명당 확진자는 273명이고 사망자는 5.8명이다. 각국의 확진자 및 사망자 수치는 7월 24일 기준이다. 그리고 공정한 비교를 위해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실제 숫자가 아니라 인구 1백만 명 기준으로 환산한 값이다.
앞에서 우리나라의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제시한 것은 K-방역의 우수성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선진국'의 부실한 대응 능력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도록 비교 기준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룩셈부르크, 미국 그리고 스웨덴은 분명히 중요한 부분에서 우리보다 '앞서나간 나라'이지만,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큰 허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우리를 더욱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 체제의 허점이 단지 코로나바이러스 통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조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적극적으로 지켜주는 사회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 방식의 새로운 사회 발전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 방식이 후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준 것도 역시 코로나-19 팬데믹이다. 박재묵 대전세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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