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대를 살아내는 것은 훗날 생각처럼 그리 간단치가 않다. 더구나 창조적 작업은 기대난망이다. 그런 시기를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문인이고 화가이며 여성운동가인 나혜석(羅蕙錫, 1896.04.28. ~ 1948.12.10)이다. 나혜석 하면 붙이는 꾸밈말이 참으로 많다.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김명순과 선후를 다투는 최초 여성 소설가,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 신여성의 상징, 영원한 신여성 등등.
최초 여류 서양화가란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의 글을 모아 '나혜석의 사랑과 예술'이란 부제를 붙인 책 『달뜨고 별지면 울고 싶어라』(1981)가 첫 만남이었다. 전하는 메시지가 워낙 강렬한 탓인지 현재까지도 지속해서 관련 서적이 출간된다. 미술대전을 포함하여 그를 기리는 각종 행사가 개최되기도 하며, 수원 인계동에는 '나혜석 거리'가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여자도 인간이다.' 그는 각종 말과 글, 작품을 통해 줄기차게 주장한다. 여성의 사회적 각성을 촉구한다. 그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냉철한 비판적 시각에서 출발한다. 당시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비롯한 가부장적 유교문화가 고착되어 있던 때다. 일본마저 '황국여성(皇國女性)'을 만드는 전초작업으로 철저한 복종형 여성상을 여성의 이상형으로 제시했다. 그의 부친은 상당한 진보적 엘리트였으나 가부장적 권위의식은 여전했다. 여러 첩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 중엔 나혜석보다 1살 연상인 어린 첩도 있었다. 젊은 첩이 사랑을 독차지하자 나혜석의 모친인 본부인에게까지 온갖 갑질을 하였던 모양이다. 남성 중심 가부장적 사회를 몸소 체험하며 극심한 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기 위해 몸부림쳤다. 노리개인 인형보다 인간이기를 갈구했다. 가사노동, 가정폭력 등 인습의 굴레에서 받는 고통으로부터 탈피를 외친다. 부덕(婦德) 장려는 여성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 주장한다. 문제점만 적시하는 것이 아니라, 살림살이 개선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성 평등을 외친다. 남자로부터의 경제적 자립, 여성의 사회참여를 통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여성의 정조는 취미일 뿐, 도덕이나 법률이 아니다. 현모양처론을 반박하며 결혼은 여성을 억압하고 옥죄는 족쇄로 파악한다. 종속 관계로 맺어지는 결혼의 불합리성을 타파하자 한다. 불행한 결혼 유지나 이혼의 비극을 예방하기 위하여 시험 결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이는 에미의 살점을 떼어먹는 악마'라며 모성애조차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강요된 결과물로 파악하기도 한다. 참다운 여성해방, 자유를 희구했다. 시몬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01.09. ~ 1986.04.14. 프랑스 작가, 철학자)의 『제2의 성』이나 정비석(鄭飛石, 1911.05.02. ~ 1991.10.19. 소설가)의 『자유부인』이 문제가 아니다. 현시점에서 보아도 지나치다 싶은 과격한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도 있다.
수원의 넉넉한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서울 진명여자보통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13년 도쿄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한다. 이때부터 여성운동에 눈을 떴다. 최승구와 사귀기도 했으나,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한다. 기혼이었던 이광수와 가까이 지내기도 한다. 1920년 24세에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한다. 일부러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나 전폭적으로 된다. 심지어 첫사랑 최승구의 묘로 신혼여행을 가기도 한다. 5년간 만주 생활을 하기도 하고, 1927년 남편 포상휴가로 1년 9개월여 유럽과 미주 중심 세계여행을 한다.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등 미술 사조에 매료되기도 한다. 작가로서 끊임없이 정체성을 탐구하는 여행이 된다. 여성은 위대한 것이요, 행복한 것이란 깨달음도 얻는다. 이때 만난 최린과의 외도로 결혼 생활이 파경에 이른다. 그녀의 생을 살피다 보면, 예술과 자아, 모든 행태가 하나였지 않나 하는 느낌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짧은 지면에 전하기 어렵지만, 그가 가진 의식 이상으로 많은 혜택도 받았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탓인지, 1921년 첫 전시회는 대성황을 이룬다. 수많은 관람자도 관람자지만, 각 3백 원씩 책정한 그림이 모두 팔리는 기적 같은 일도 벌어진다. 당시 직장인 평균 월급이 20원이었다 하니 놀랍지 아니한가?
3·1운동 당시엔 김마리아, 김활란, 박인덕, 신마실, 황에스더 등과 함께 비밀집회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1920년대에는 비밀리에 의열단 활동을 비롯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총독부 학무국에서 내선일체에 협력하라며 진료비와 집, 화실 제공을 제시하며 회유하기도 하나 단호히 거절한다. 신사참배,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제에 저항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선각자는 남달리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강할수록 아픔도 배가된다. 동시대 활동한 김명순은 정신이상자가 되어, 윤심덕은 자살로, 김일엽은 승려로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은 방황과 비루한 삶으로 말년을 보냈으며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다.
요즘 세태를 보면 참 가관이다. 우리는 인간, 특히 여성을 도구나 비인격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00년 전 한 여성이 가졌던 생각에 얼마나 다가가 있을까?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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