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비창(悲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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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비창(悲愴)

엄기창 / 시인

  • 승인 2020-07-09 15:41
  • 수정 2020-07-09 15:46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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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빈 배낭에 물병 하나 달랑 집어넣고, 단장 짚고 현충원 둘렛길을 걸었다. 산하(山河)는 뿌연 속진(俗塵)에 잠겨있다. 억새꽃 하얗게 덮인 길을 걷노라니 먼지에 덮인 세상이 마치 조화弔花처럼 생기가 없다. 내려다보는 계곡은 비석의 바다다. 나라를 위해 바친 목숨들이 비석으로 서있는 곳. 하고 싶은 간절한 말들도 꽃으로밖에 피울 수 없는 곳. 나는 망연히 바라보다 그 곳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병 ○○○의 묘. 무엇을 지키려다 어느 골짜기에 쓰러진 영혼인고? 죽음의 의미가 한없이 퇴색한 세태라서 질펀히 깔려있는 묘비들이 더욱 슬프다. 저들은 분명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을 것이다. 5월이면 철쭉꽃 영산홍꽃으로 밀어올리는 짙붉은 분노. 10월이면 억새꽃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하얀 한숨. 나는 주머니에서 오늘 처음 들고 온 새 손수건을 꺼내서 닦을 것 하나 없는 비문碑文을 닦고 또 닦아냈다. 문득 내 오랜 교직의 길에서 아끼던 제자 장덕현 군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

비석을 닦는다.
마모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햇살 아래 드러난다.

묘지 앞에 심어진
시들지 않는 조화 몇 송이와
누군가 놓아두고 간 과일들에 배어있는
눈물의 흔적



흘러가는 세월 따라 흐르다 보면
모든 것은 삭아서 희미해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파래지는
이끼 같은 슬픔도 여기 있다.

지하에 묻혀있는 영혼들의 외침이
한 송이씩 영산홍꽃을 피워 올리고,
향기처럼 떠도는
핏빛의 외로움
비석을 닦는다.

아픔의 찌꺼기 굳은살로 박혀있는
비문을 하나씩 짚어가며 닦다가 보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리고

손끝으로 전해오는
그들의 이야기가 들릴 듯하다.


-장덕현-'현충원에서'

제36회 통일문예제전에서 국회의장상을 수상했던 시다. 정말로 비문을 한 자 한 자 짚으며 닦다가 보니 마모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들려와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았다. 시들지 않은 조화 몇 송이와 누군가 놓아두고 간 과일들에 배어있는 눈물의 흔적이 겨울 찬바람 속에서도 파래서 시리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싱싱해지는 이끼 같은 슬픔, 과연 누구를 지키려고, 무엇을 위해 청춘의 꽃다운 목숨을 장렬하게 산화한 것일까.

고귀한 목숨 값이 노란 리본에 가려져 한없이 작아진 요즈음, 폐기(廢棄)한 것도 없는데 전략적 미소 한 방에 저고리 치마 다 벗고 벌러덩 누워 모두 주려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모르고 박수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슬픔과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울컥 하는 감정 속에 차이콥스키의 6번 교향곡 비창(悲愴)의 악상이 떠올랐다. 묘비(墓碑)의 바다가 주는 장중함과 우울함, 그리고 그 아래 영혼들이 느끼고 있을 패배감과 절망이 11월의 삭막한 하늘처럼 내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 명하니 앉아 하염없이 어깨를 떨 수밖에 없었다.

엄기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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