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진 부장 |
사헌부의 역사는 오래됐다. 통일신라시대 때는 사정부(司正府), 발해시대 당시에는 중정대(中正臺)로 불렸다. 고려 건국 후에는 여러 차례 바뀌다가 공민왕 재위 때 사헌부로 굳어졌다.
권한은 막강했다. 조정 중신을 비롯한 권력자와 고위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를 찾아내 엄벌했다. 관리임명권과 법률 제정에도 참여하면서 왕권을 견제했다. 대한민국에 빗대면 감사원과 대검찰청 역할을 했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기관이다. 사헌부의 수장은 대사헌으로, 오늘날의 검찰총장이라 할 수 있다.
사헌부 못지않게 권력을 감시했던 기관이 바로 사간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언론이 그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신들을 비롯해 모든 관리의 정책과 행실을 꾸짖고, 관리 선발 과정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여론을 모아 왕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했지만, 가장 큰 임무는 국왕의 잘못이나 비행을 비판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사간원 사람들은 강직할 수밖에 없어 다른 관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물론, 강도 높은 직언과 충언으로 쫓겨나거나, 사약을 받는 경우도 상당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즉 양사가 한목소리를 낼 때가 많았다. 임금이 거처하는 대전(大殿) 또는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 앞에서다. 통상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러 명의 신하가 무릎을 꿇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며 선창에 맞춰 복창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양사가 함께 연명(連名)해 임금에게 올리던 글, 이를 ‘양사합계’(兩司合啓)라 불렀다.
양사합계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중신은 물론, 임금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분명한 건 국정을 바로잡고, 관리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며,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등 순기능이 많았다. 두 기관이 한목소리를 낼 때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만큼 폐단도 적지 않았다.
중종 재위 때에는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을 지낸 김안로(金安老)의 권력 놀음에 놀아났다. 대표적인 간신인 그는 아들과 효혜공주를 혼인시킨 후 중종에 맞서 권력을 휘두르다가 유배를 떠났지만, 대사헌과 대사간을 움직여 복귀해 좌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중종이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을 장악하면서 김안로는 유배지에서 3일 만에 죽임을 당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권력에 따라 부화뇌동했다.
눈치를 보며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열을 올린 적도 많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가 대표적이다. 국난 중임에도 당파싸움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때, 왕인 선조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려 사헌부와 사간원의 충성 경쟁은 심했다.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체포해 한양으로 압송한 후 국문(鞫問)하고 탄핵하는 과정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은 진실과 사실을 외면했다. 부화뇌동하며 당파의 이익을 따졌다. 사헌부는 사실을 보지 않았고, 사간원은 진실에 눈을 감았다. 양사는 권력을 지향했고, 합계는 권력에 이용됐다.
최근 소위, ‘검·언 유착’ 사건의 본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검·언 유착 의혹 사건 수사를 누가 할지를 놓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검찰총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인사가 연루됐다는 점에서 추미애 장관의 법무부가 적극적으로 권한 행사에 나섰지만, 대검을 중심으로 보호막을 치고 맞서고 있다.
조선시대, 사헌부의 비리는 의금부(義禁府)가 맡았다. 의금부는 임금의 명령으로 중죄인을 신문하는 기관으로, 오늘날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 일환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라 할 수 있다. 의금부가 나서야 할때가 온 듯싶다.
윤희진 경제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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