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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인간은 동물의 고기를 먹고 산다. 인간 사회에서 그것은 지극히 합법적이다. 이에대해 약육강식의 원리를 들이대면 설명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인간은 그것을 자연의 섭리로 간주하니까.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관계! 인간의 문명은 계급 갈등으로 점철돼 왔다. 마르크스의 계급론이 달리 탄생했겠는가. 그러나 인류사에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과 동물 간의 계급을 논한다는 건 생뚱맞다고 여겨졌다. 어디까지나 인간만이 지고한 고등동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 마을에선 동물을 잡는 일이 흔했다. 명절이나 한 여름 몸보신 차원에서 살찐 돼지 한 마리 잡아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었다. 고기가 귀해 쉽게 먹지 못하던 시절, 작정하고 날 잡아 배불리 먹는 마을 잔치인 셈이다. 그런데 그 날 '간택된' 돼지는 쉽게 죽을 수 있는 운명이 아니었다. 돼지는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길고 긴 고통을 겪는다. 동네 장정들은 밧줄로 묶은 돼지를 옆으로 누인 다음 식칼로 목을 딴다. 선지피를 받기 위해서다. 발버둥치는 돼지의 처절한 비명은 세상 끝까지 울려 퍼진다. 그 사이 돼지 목 아래에 놓인 양동이엔 시뻘건 피가 비린내를 풍기며 콸콸 쏟아진다. 돼지의 생명줄은 질겼다. 목에 구멍이 뚫린 채 많은 피를 쏟아내고도 한참을 버텼다. 인간의 고통과 동물의 고통은 다를까.
조르주 바타유는 평생 에로티시즘에 천착한 사상가다. 그는 죽음과 에로티시즘은 궤를 같이 한다고 보았다. 다소 괴짜같은 성향의 바타유는 20세기 초에 찍힌 한 몽골인의 흑백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사진 속 몽골 청년은 도둑질하다 붙잡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었다. 나무에 묶인 청년은 팔이 잘리고 가슴팍의 살도 도려진 끔찍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청년은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타유는 이 사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이 그토록 이 걸출한 사상가를 매혹시켰는지 나는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얼마 전 방송에서 사육곰 불법 도살 장면이 보도됐다. 농장주는 손님을 초청해 반달가슴곰을 보여주며 도살했다. 마취 총을 쏴서 혀를 자르고 발바닥을 자른 다음 몸을 차례로 해체했다. 그 모든 과정은 새끼 곰들과 다른 동물들이 보는 가운데 이뤄졌다고 한다.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은 동물의 고통에 관심이 많았다. 벤담은 인간과 동물을 같은 선상에서 보았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모든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체계가 발달했다고 한다. 먹방 프로에서 살아 있는 문어가 끓는 물 속에서 몸부림칠 때, 불에 달궈지는 석쇠 위에서 조개가 입을 딱 벌리고 거품을 토해내는 걸 보면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 인간이 육식을 멈추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도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는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고 동물복지에 대해 한 발짝 나아가자는 얘기다. 역지사지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뉴노멀 시대 아닌가.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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