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나지막한 산길을 엄청난 산악대원처럼 중무장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사람도 만난다. 과한 옷차림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경험이 쌓인 대부분 사람은 해당 일에 적합한 준비만 한다. 짐을 줄이는 것이다. 지나침을 삼간다. 한편 생각하면, 유비무환이다. 보다 철저한 준비가 나쁘기야 하겠는가? 연습은 실전처럼, 더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한 준비일 수도 있다. 이왕 하는 운동 좀 더 난이도를 높여 행하는 것이 탓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우리는 열심히 사는 것을 선으로 생각한다. 그르지 않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가가 아닐까? 헛된 일에 쏟아부은 최선이 최선일 수 있으랴. 그것도 과하게 말이다.
장자(莊子) 양왕(讓王)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옛말에도 '도의 순수한 것으로써 몸을 다스리고, 그 남은 부스러기로써 나라를 다스리며, 남은 찌꺼기로써 천하를 다스린다(故曰, 道之眞以治身, 其緖餘以爲國家, 其土?以治天下)"며 몸을 위태롭게 하고 그 생을 버리면서 부귀를 추구하는데, 어찌 슬프지 않은가? 쓰이는 물건은 귀중한데 얻으려 하는 것은 하찮은 것임을 일깨우며, 나아가려는 곳과 하는 일을 잘 살피라 한다. 보석으로 참새를 쏘아(以珠彈雀)서야 되겠는가? 이주탄작은 수주탄작(隨珠彈雀), 명주탄작(明珠彈雀)이라고도 한다. 게다가 사람은 보석보다 더 소중하다.
소탐대실(小貪大失)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누구나 쉽게 범하는 오류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에서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의미를 더 넓혀보자. 소는 부귀공명이요, 대는 나 자신이다. 자신의 안락이 얼마나 소중한가? 십중팔구는 얻지도 못할 부귀공명에 어찌 하 많은 시간과 금전을 투자하는가? 또 얻은 들 무엇하랴, 일장춘몽(一場春夢)인 것을.
옛사람 또한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김홍도(金弘道, 1745 ~ 1806?, 조선 도화서 화원)가 그린 《월하청송도(月下聽松圖)》를 보자.
김홍도 필, 월하청송도(月下聽松圖), 지본수묵담채, 34.7 × 29.2㎝, 개인소장 |
김홍도의 다른 유작에 비해 수작으로 보기는 어렵다. 시의(詩意) 표현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측 상단에 산그림자처럼 시 한 편이 행서로 쓰여 있다. 『단원유묵첩』에 의하면 '산거만음(山居漫吟)'란 제목의 시이며, 끝에 서명한 단구(丹邱)는 김홍도가 사용한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士)·첩취옹(輒醉翁) 등 여러 호 중 하나이다.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해도 누가 되고
부귀가 솔솔 하늘에 닿아도 부질없는 수고일세
산창으로 보이는 고요한 밤 봉우리 같네
향 하나 피우고 앉아 소나무 일렁이는 소리를 듣네
(文章驚世徒爲累 富貴薰天亦?勞 何似山窓岑寂夜 焚香點坐聽松濤)
김홍도는 정조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 정조(正祖) 사망 후 집권세력으로부터 배척당하자 공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성찰과 수도하는 자세, 작게는 현실을 개탄하는 속내가 담겨있지 않을까? 단순히 상실 다음에 오는 깨달음이 아니다. 나아가 세상일, 인생의 공허함과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욕망 채우는 것을 행복으로 착각한다. 남들은 다 손가락질하는데, 정작 자신은 부귀영화로 생각한다. 종교도 주머니를 차면 타락한다 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 또한 이주탄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탐대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본말이 전도되지 않도록 한 걸음 내딛기에 앞서 항로를 다시 살필 일이다.
양동길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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