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런 상황에서의 대원칙은 해당 취재기자에게 연락을 해 뭐가 됐든 부탁하는 거다. 그렇지만 이 일들이 너무도 사소하고, 동시에 상대의 대답마저 확신할 땐, 그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서 가끔 그랬다. 기사 내에 있는 오타를 몰래 고치거나, 칼럼의 양을 기술적인 면에서 어떻게든 해결했다. 취재기자는 지금 매우 바쁠 거야, 라는 넘겨짚음 속에 일일이 연락하기 귀찮은 내 마음을 숨긴 채. 취재기자와의 통화나 특별한 언질 없이!
근데 이건 빚이다. 나의 귀찮음이 나와 같은 일을 할 다음 사람의 빚이 되는 거다. 말하자면 이렇다. 칼럼의 양이 맞지 않다는 걸 모르는 취재기자는 계속해서 같은 양의 칼럼을 보낸다. 만약 내 다음 편집자가 나와 비슷하다면 아마 적당한 선에서 일을 해결할 거고, 빚은 더 커진다. 문제는 원칙적인 편집자가 나타났을 때 일어난다. 편집자는 당연하게 칼럼의 양을 줄여달라 요구한다. 하지만 취재기자는 언제나처럼 같은 양을 보냈기에 당황한다. 그 기간은 길면 길수록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결국 갈등은 일을 자초한 사람이 아닌 애먼 사람이 경험하게 된다. 쌓일 대로 쌓인 빚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탕감된다.
빚은, 빚을 진 주체가 갚는 것이 마땅한 일인 동시에 당연스러운 생리다. 크든 작든, 시간이 오래 걸리든, 그건 빚을 진 주체의 몫이다. 문제는 빚을 낸 주체와 빚을 갚는 주체가 다를 때 일어난다. 부모가 진 도박 빚을 갚는 자식들이나, 친구를 위해 선 보증으로 재산을 잃는 금전적인 사례부터 조별과제 무임승차나 쓰레기 무단투기 같은 흔하게 경험했을 법한 일들까지.
세상을 덮쳐버린 코로나 사태도 그렇다. 유흥을 위해 이태원을 찾은 사람들, 종교적 신념을 위해 모인 단체들, 비용 때문에 방역수칙을 외면한 기업들, 그들은 빚을 졌다. 그리고 그 빚은 국민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정부,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의료진, 나아가 자신의 자유를 죽이며 조심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대신 탕감되고 있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빚을 질수 있다. 물질적이든 심적이든, 원했던 원치 않았던 모든 인과관계 속에 언제든 가능하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거다. 내가 내린 결정이나 선택, 혹은 곧 하게 될 행동들이 어떤 빚을 늘려가는 일인지, 그리고 그 빚이 타인이 갚게 될 빚인지, 또 어쩌면 내게 더 크게 돌아올 빚인지 생각해봐야만 할거다.
유지은 기자 yooj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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