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들판은 지금 보면 그리 넓지 않다. 게다가 들판 가운데로 고속도로가 지나가 이제는 오히려 좁아 보인다. 멀리 계룡산과 미륵산이 보인다. 가까이, 산이라고 하기엔 뭐한 구릉이 여기저기 있다. 필자는 그 구릉 중 하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강점기 설치한 수리시설이 지나간다. 그조차 가깝지도 않다. 탑정호에서부터 흘러온 물이 들판은 물론 많은 마을을 지난다. 모든 논을 거치고서야 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수리시설은 수리조합이라 불렀다. 어려서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다. 농민의 지배와 수탈을 위해 일제가 식민농업정책 일환으로 설치한 것이다. 생산성을 높여 착취를 더 많이 하려는 의도였으나 공사비와 수세 모두 농민에게 부담시켰다. 이에 수리조합반대운동이 거셌다. 나아가 독립운동 성격도 강하게 띠고 전개되었다. 1921년 전북 익산과 강원 철원을 시작으로 1934년까지 전국에서 지속 되었다.
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보니, 물길이라야 개천이 전부인 곳이다. 수리조합은 대단히 큰 물길로 보였으며, 여름이면 아이들에게 좋은 물놀이장이 되기도 했다. 수리조합 둑이나 들판에는 작은 나무조차 없다. 여름이면 벼가 만든 짙은 녹색의 바다와 푸른 하늘이 전부이다. 뜨거운 햇살만 모여 뛰어논다. 거기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수리조합, 바닥이 패여 조금 더 깊은 곳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떠돈다. 듣기로, 남녀가 노는 장소만 달랐을 뿐, 밤에는 어른들도 물놀이를 즐긴다 했다.
부처도 강에서 목욕하고 보리수 밑에서 깨우침을 얻었다. 육신의 때뿐인가, 마음의 때를 씻는 의미가 강하다. 때문인지 불가에서는 식욕과 배설 같은 본능과 다를 바 없이 중요히 여긴다고 한다. 연구자에 따라 다르지만, 오늘날 대중목욕탕이 신라 사찰의 목욕실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목욕을 즐기는 일은 민간에서도 다르지 않아, 고려 시대에는 하루 서너 차례 목욕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큰 강에서 남녀가 어울려 목욕을 즐겼다 한다. 다만, 여자는 목욕용 모시 치마를 착용했다고 전한다. 그러던 것이 유교 영향으로 의식과 풍습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목욕 문화도 퇴색하나, 야외에서 목욕을 즐기는 일은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 ~ ?, 조선 도화서 화원)의 《단오풍정(端午風情)》(신윤복필풍속화첩, 28.2 × 35.2㎝, 간송미술관, 국보 제135호)이 그를 대변해 준다.
신윤복 《단오풍정(端午風情)》 |
깊은 산중일까? 보기만으로도 시원한 계곡물에 웃통 벗은 여인네 넷이 치마를 걷어붙인 채 몸을 닦고 있다. 팔, 머리, 얼굴을 닦거나 서 있다. 나름 물을 즐기는 모습이나 마음 까지 시원하다, 감탄사를 연발하는 느낌이다. 오른쪽엔 물건이 잔뜩 든 보따리를 머리에 인 아낙이 언덕을 오르고 있다. 풍만한 가슴이 저고리를 비집고 나와 세상 구경이다. 화폭의 중앙 가까운 곳에 노란 저고리와 붉은 치마 입은 여인이 그네에 오르고 있다. 목욕하는 여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미 목욕을 끝냈을까? 그 뒤로 두 여인이 머리를 매만지며 앉아 있다. 고목의 늘어진 가지 아래로 두 아이가 보인다. 바위 틈새로 목욕하는 여인을 몰래 훔쳐본다. 몹시 집중하고 있다. 까까머리인 것으로 보아 동자승이 아닌가 싶다. 남정네의 속내를 보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림의 앞에서부터 글로 옮겼지만, 시선은 그네에 오르는 여인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자연스레 끌려간다. 단오 맞이로 하는 몇 가지 풍습을 담았다. 자연과 인물이 잘 어우러져 있다. 본래 한복 곡선이 아름답지만, 의상의 선이 참 우아하다. 신윤복의 다른 그림도 다르지 않다. 과거의 작품에서 여인의 알몸을 화제로 삼는 경우는 춘화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다. 서양에서조차 누드화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는 모두 다르지만, 미적 감동은 크다.
신윤복은 무엇을 그리고 싶었을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을까? 이런 장면을 보기나 한 것일까? 어떤 미적 쾌감을 주고 싶었을까? 함께 찾아보자.
작가는 끊임없는 성찰로 창작 활동을 지속한다. 성찰에는 의도적 차별화가 포함된다. 뭔가 달라야 한다. 바꿔말하면 긍정적 문제의식이다. 한가지, 성찰의 대상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는 양지가 부상되었다, 음지가 강조되었다 하는 것이다.
양동길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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