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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눈에 선하다. 압도하는 듯한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테스(나스타샤 킨스키)가 딸기를 먹는 장면 말이다. 더버빌 가의 바람둥이 청년 알렉은 테스에게 딸기를 좋아하냐고 묻는다. 테스는 "좋아해요. 딸기철이 되면요"라고 대답한다. 알렉은 잘 익은 딸기 하나를 골라 꼭지를 쥐고 테스의 입에 디민다. 머뭇거리던 테스는 결국 탐스럽게 익은 빨간 딸기를 붉은 입술을 열고 받아 먹는다. 겁먹은 듯 커다란 눈의 테스는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알렉이 주는 딸기를 계속 먹게 된다. 알렉의 음흉스런 속셈을 순결한 여인 테스가 알 리가 없다. 테스의 꽃같은 입술에 들어가는 딸기는 비극적 재앙의 씨앗임을 암시한다. 딸기는 순진한 아가씨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선악과인 셈이다.
딸기만큼 맛있는 과일도 없다. 딸기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온다. 초록의 무성한 잎사귀 밑에서 수줍게 매달린 딸기. 어릴 적 우리 집 담장은 돌과 흙이 버무려진 토담이었다. 담장 아래엔 철따라 꽃들이 피었다. 과꽃, 채송화, 맨드라미, 봉숭아꽃 그리고 딸기가 있었다. 딸기는 작고 볼품없이 맺힐 뿐 탐스런 열매는 보기 힘들었다. 어느날 이파리들을 손으로 들추다 큼지막한 딸기 하나를 발견했다. 응달진 돌 틈에서 사람 눈에 띄지 않아 온전하게 자란 것이다. 딸기는 채 익지 않아 반은 빨갛고 반은 푸르스름한 흰색이었다. 노란 씨앗이 주근깨처럼 단단하게 박힌 딸기를 살짝 베어 물자 새콤함이 입 안에 퍼지면서 침샘이 마구 터졌다.
이제 딸기는 한겨울에도 먹는다. 마트에 가면 주먹만한 딸기가 진열돼 있어 도대체 딸기철이 언제인지 헷갈릴 정도다. 나는 추운 겨울에 나오는 딸기는 당최 손이 안 간다. 입안에 넣으면 서늘하고 스폰지를 씹는 느낌이 영 별로다. 비록 하우스 딸기지만 봄볕을 받는 4월쯤 돼야 사다 먹는다. 간혹 제철 딸기를 운 좋게 먹기도 한다. 집 근처 금요장터에선 대전 근교 농부들이 재배한 신선한 농작물이 직거래된다. 작년에도 초여름 기운이 물씬 느껴질 즈음 진짜배기를 만났다. 소쿠리에 가득 담긴 검붉은 딸기. 송홧가루가 노랗게 앉은 걸로 봐서 제철딸기가 틀림없었다. 크기도 하우스 딸기보다 훨씬 작았다. 아주머니가 맛보라며 하나 건넸다. 달콤한 향이 진했다. 몇 개를 더 먹어보고 딸기 소쿠리를 얼른 안았다.
무르익은 딸기는 연약해 손으로 누르면 쉽사리 으깨진다. 짓이겨진 딸기에서 나오는 빨간 물은 옷에 묻으면 지워지지 않는다. 딸기를 먹으면 비련의 여인 '테스'가 떠오른다. 영화에서 딸기는 성적 메타포다. 딸기는 또한 살인을 저지르는 테스의 핏빛 운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안개 자욱한 스톤헨지에서 경찰에 압송되는 테스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그녀가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자막이 나온다. 나는 테스의 기구한 운명에 화가 나 가슴이 떨렸다. 만약에, 반대로 테스가 알렉의 입에 딸기를 넣으며 유혹한다면 어떨까. 남자들을 실컷 농락하고 버리는 팜므파탈 영화가 되려나? <우난순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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