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식이는 욕심 많은 심술쟁이였지만 힘이 약한 어린이였다.
철민이는 평소 말이 적은 편이었지만 의리도 있고 힘도 있는 같은 또래였다.
보식이는 옆집 보미의 손에 쥐어 있는 복숭아가 먹고 싶어 슬금슬금 접근을 했다.
갖은 유혹을 해 보았지만 보미는 주지 않았다. 궁리 끝에 보식이는, 보미가 한눈파는 사이에 복숭아를 낚아채 달아났다. 보미가 울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의리의 사나이 철민이가 쫓아가서 복숭아를 빼앗아 보미에게 주었다.
씩씩거리기만 하던 보식이가 철민이에게 대들었다.
철민이는 주먹으로 보식이를 한 번 쳤다. 보식이 눈두덩 위가 퍼렇게 멍들었다.
보식이가 엄마한테 달려가 일렀다. 보식이는 거짓말을 했다. 철민이가 이유도 없이 보식이 복숭아를 빼앗아 갔고,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고 울면서 소리까지 질렀다.
아들 눈두덩 위 퍼런 멍을 본 엄마는 화가 났다. 엄마는 보식이 말만 듣고 철민이만 일방적으로 혼내고 있었다. 철민이는 분하여 울고 있었다. 슈퍼마켓에서 나오던 철민이 엄마가 그걸 보았다. 동시에 두 엄마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 것이었다.
싸우게 된 동기는 보식이의 눈두덩 위 퍼런 멍이었다. 아들 말만 듣고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보식이 엄마 때문이었다.
보고 들은 것만 가지고 진위를 가리는, 아니, 시비를 가리는 싸움이 된 것이었다.
보고 들은 것만 가지고 따지는 두 엄마 싸움을 보고 '키몬과 페로'라는 미술 작품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키몬과 페로' 작품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국립미술관 입구에는 벗다시피 한 노인이, 노출된 젊은 여인의 젖가슴을 빨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다.
이 그림은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의 작품으로, 제목은 키몬과 페로(cimon and pero)이다.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 세계적인 명작으로 평을 받고 있다.
미술관에 들어서다가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개가 당혹스러워한다.
실화 내용을 제대로 모르고 감상하는 사람들은, 딸 같은 여자(페로)와 놀아나는 노인(키몬)의 부적절한 애정행각을 그린 작품이라며 불쾌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포르노 같은 그림이 국립미술관의 벽면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실화 내용을 알고 있는 그 나라 국민들은 이 그림 앞에서 숙연해진다.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는 그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검은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인의 아버지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키몬은 푸예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자였다.
그는 노인이었지만 나라 사랑의 마음으로 의미 있는 운동에 참여했다가 국왕의 노여움을 사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국왕은 그를 교수형에 명하고 교수형이 집행될 때까지 아무런 음식도 갖다 주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음식물 투입금지로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은 딸은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감옥으로 갔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본 순간. 물 한 모금도 못 먹고 퀭한 눈의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아버지의 가련한 모습을 바라보는 딸의 눈에는 핏발이 서는 것이었다.
굶어서 돌아가시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웠겠는가.
여인(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 입에 물렸다.
이 노인과 여인의 그림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하나의 그림을 놓고 어떤 사람은 '포르노'라 비하하기도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성화'라고 격찬하기도 한다. 같은 작품을 놓고 지옥과 천국을 말하는 평 같아서 안타깝기만 하다.
'노인과 여인'에 관한 실질 상황을 모르고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본질을 알지 못하는 데서 폄하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게 되면 눈물을 글썽이는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어쩌면 우리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하는 현상적인 눈과 귀로, 보이고 들리는 것만으로 판단을 내릴 지도 모른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려 놓는 격이 되는 것이다.
감상자의 무지의 소치로 호랑이 그림을, 고양이 그림이라 하는 식이어서야 되겠는가!
귀와 눈만을 믿어서야!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진실은 아니다.
사실과 진실이 등식 관계가 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실과 진실은 상수관계도, 함수관계도 아닌, 비밀스런 본질로 숨 쉬며 그 존재 가치를 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남에게 속고 사기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무지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겠다.
진실을 알면 눈에 보이는 대상이 제대로 보인다.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도 생긴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에 너무 의존하여 눈과 귀에 속는 둔치는 되지 말아야겠다.
호랑이의 그림을, 고양이 그림으로 보는 식의 무지의 소치를 범하지는 말아야겠다.
그림감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눈과 귀만을 믿어서야 !
보식이, 철민이 엄마가 얼굴 위 퍼런 멍만 보고, 애들 말만 듣고 싸운 것도 눈과 귀만을 믿은 것이었다.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진실은 아니다.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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