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현, 노인의송도, 18세기, 지본담채, 27×20㎝,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
'사회적 거리 두기'를 5월 5일까지 연장했다. 다만 방역 지침(출입 전후 발열 체크, 사람 간 간격 유지, 공용물품 사용금지, 환기 등) 준수를 전제로 종교, 유흥, 실내체육 등 일부 집단시설에 대해 완화했다. 전통적인 방법이며 가장 오래된 비의료적 방역법이다. 한편으론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실로 커다란 문화 격변이 도래했다. 자발적 감금 상태다.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나 불안, 우울증, 공황장애 같은 심리적 질환에 시달리기도 한다. 나아가 활동 축소로 모든 사회 분야가 거의 마비 상태다. 불황을 걱정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 사람이다. 거리가 생겨서는 안 될 일이다. 왠지 어감도 좋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세계보건기구는 물리적으로만 거리 두는 것을 강조하자는 의미로 '물리적 거리 두기'로 표현하자고 권장하기도 했다.
술버릇처럼 고치기 어려운 것도 없다고 한다. 애주가가 송신(?身)이 나, 몹시 견디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왠지 혼술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권커니 잣거니 하고, 말과 몸이 부딪히는 안줏거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분야가 그러할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는 방식이 관성적이고 습관적이지 않은가? 답답하지 않은 분야가 있겠는가?
그림 하나 감상하자. 오명현(箕谷 吳命顯, 생몰 미상)작 「노인의송도(老人倚松圖)」이다. 작가 오명현은 김홍도나 신윤복보다 앞선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한다. 정선과는 일정 부분 활동 시기가 겹친다. 조선 풍속화 발전의 중요한 위치에 놓인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의관을 갖춘 선비가 노송에 기대어 몸을 추스르는 그림이다. 사람이 취했는지 소나무가 취했는지 비비 꼬이기는 마찬가지다. 소나무 여기저기 옹이와 생채기로 얼룩져 엄청난 연륜이 묻어난다. 심하게 비틀어진 가지도 살아온 세월을 대변해 준다. 선비는 소나무 아래 오줌 누고 돌아서, 바지춤을 단도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선비 행색을 위에서부터 살펴보자.
이미 한 대거리하고 오는 것일까, 혼자 고꾸라졌을까. 갓은 찌그러지고 구겨지고, 엉망진창이다. 몸조차 지탱이 어려워 소나무에 기대고 눈도 뜨기 힘든 만취 상태다. 정신력은 대단해 보인다. 풀어헤친 옷매무새를 아직 바로잡지 못했을 뿐,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고뇌를 풀어낸 탓일까, 안색이 아주 편안하다. 그 상황에 장죽인지 지팡인지 긴 막대를 오른손에 틀어쥐고 있다. 풀어헤친 도포와 저고리 사이로 맨살이 보인다. 언제쯤 묶일지 모를 허리띠를 더듬더듬 어른다. 멈춰서지 못한 발이 절로 흔들린다. 의상도 그렇지만, 신발이 매우 고급스러워 보인다. 문양이 있는 가죽신이다. 전체적으로 행세깨나 하는 여유 있는 양반 모습이다.
안 마시면 몰라도 술 마시는 사람이면 누구나 만취 경험이 있을성싶다. 그림이 자신 또는 타인의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진정 애주가라면 이보다 더한 기행이 얼마든지 있을 법하다.
작가는 왜 술 취한 양반 모습을 이렇게 상세히 그렸을까? 엄숙하고 거들먹거리던 양반의 속내를 고발하고 싶었을까? 풍자일까? 주선과 같은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유유자적이 부러웠을까? 누구나 일탈이 있음을 깨우치고 싶었을까? 어떤 의도이면 어떠하랴, 훗날 또 하나 촌로가 이렇게 즐기고 있으니.
술집이나 술 먹는 현장 그림은 많다. 이처럼 만취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림은 보기 어렵다. 때때로 흐트러진 생활이 삶의 활력소가 된다. 일탈을 꿈꾸는 이유다. 그 일탈의 대상이 좋은 문화로 대체되었으면 한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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