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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보르헤르트 지음│박규호 옮김│문학과지성사
'더 고백할 게 있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어서다. 내가 가발이라고 부은 사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고 그가 졌음을 느낀 순간, 나에 대한 패배가 아닌 생에 대한 그의 패배를 느낀 바로 그 순간 미움은 해변의 파도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내겐 텅 빈 공허감만이 남았다. 목책에서 말뚝 하나가 꺾어진 것이다. 죽음이 휘익, 스치듯 내 곁을 지나갔다. 그래서 그렇게들 착해지려 조바심을 내었나 보다. 이제 나에 대한 가발의 승리를 인정했다.' ―「민들레」에서
'폐허문학'으로 지칭되는 독일 전후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전집이 출간됐다. 보르헤르트의 작품은 국내에서 그동안 꾸준하게 번역돼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1949년 출간된 전집의 2007년 개정 증보판을 원본으로 삼은 최초의 번역서는 『사랑스러운 푸른 잿빛 밤』이 처음이다. 개정 증보판은 1949년 당시에 제거된 구절을 복원하고, 이전 전집에 빠진 다수의 초기 시편들과 단편들은 물론, 유고 시집 『슬픈 제라늄』에 실린 시들을 추가로 수록해 전집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였다. 독자들은 이번 전집으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보르헤르트의 여러 단편과 초기 시 들을 국내에서 처음 만날 수 있다.
보르헤르트는 26년의 짧은 생애 동안 20여 편의 단편과 한 줌의 시 그리고 희곡 「문밖에서」가 전부인 빈약한 규모의 작품으로 독일 전후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가 됐다. 보르헤르트는 인생의 가장 좋은 시기를 전쟁에 빼앗기고 병든 몸으로 귀향해 전후의 폐허 속에서, 항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가운데 힘겹게 고통의 기록을 써내려갔다. 전쟁의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기인한 허무주의적 감상과 이를 극복하려는 그의 실존주의적 노력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폐허문학'으로 분류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 대부분이 시대사적 맥락을 넘지 못하고 잊혀져 간 것과 달리, 그의 작품은 여전한 생명력으로 실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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