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미 차장 |
예전엔 필요한 책을 서점에 주문하면 하루 이틀 사이 연락이 왔다. 책을 받으러 서점가는 길이 그땐 그렇게 즐거웠는데, 요즘은 그 앞을 지나면서도 선뜻 문을 열기가 쉽지 않다.
시간도 많겠다, 책장 한 칸 한 칸을 살피며 신중하게 책을 골랐다. 누군가의 리뷰나 추천이 아닌 오롯이 나만의 감으로 책을 고르는 순간이다. 책 두 권을 골랐다. 법정 스님 열반 10주기를 맞아 쉼터에서 역은 '스스로 행복하라', 이성실 작가가 쓰고, 오정림 작가가 그린 동화책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신기한 일'이다.
책을 사는 일이 이렇게 뿌듯함이 차오르는 일이었던가. 책이 든 가방 무게보다 곱절 이상 마음이 든든하고 어쩐지 어깨가 펴지는 기분이었다.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던 평범한 귀갓길, 한 달에 한 번 동네서점 가는 날을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편한 것에 물들어 곁에 있는 오래된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나를 채근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책을 품은 오래된 서점 이곳만큼 꼭 지켜주고 싶다.
#오래되다 못해 곧 무너질 집으로 들어갔다. 마음속으로 '실례합니다, 잠시 들어갈게요'라고 예의를 구한 뒤 첫발을 내밀었다. 이름 모를 넝쿨이 무성하게 자랐고, 전쟁이라도 난 듯 세간과 살림살이가 버려져 있다. 역시 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은 주인아저씨의 아버지가 1950년 무렵 손수 흙으로 살을 붙여가며 지은 집이라고 했다. 7남매와 부모님만 살아도 비좁은 이곳에서 하숙까지 했단다. 곳곳을 돌아보니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뒤주, 이젠 쓰레기나 다름없는 고지서, 어린 손자가 탔을 파란 자전거 등이 무심히 또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버려졌다. 폐허를 돌 때마다 느끼는 건 풀의 생명력이다. 마당이고 작은 돌 틈이고 흙만 있으면 바람 타고 날아온 씨앗들이 뿌리내려 쑥쑥 몸을 키운다. 집은 죽어가는데 풀은 자란다. 아이러니한 공존이 아닐 수 없다.
한때 이곳에서 웃음꽃 피우며 음식을 나눠 먹고 내일을 꿈꿨을 이들이 있었을 텐데, 폐허는 며칠 후면 와장창창 울음소리마저 묻힌 채 무너지고 말 게다. 이름 모르는 가족들의 행복했던 그때를 상상하니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오래된 집, 이곳은 지켜줄 수 없다.
나는 오래된 서점에서는 미래를 봤고, 오래된 집에서는 지켜낼 수 없는 과거의 추억을 봤다. 물론 중요한 건 현재의 우리다. 그래도 누군가는 과거와 미래를 돌아보고 앞서 보며 고민해줘야만 현재를 사는 의미가 있다.
투표가 끝나면 많은 이들의 미래가 바뀐다. 과거를 뒤집겠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현재를 지키며 미래를 바꾸겠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과연 누가 웃는 아침이 될까.
이해미 경제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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