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유럽에 페스트(흑사병)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도 이탈리아를 통해서라고 한다. 1347년 10월 시칠리아에 크리미아로부터 12척의 상선이 도착했다. 선원의 대부분이 끔찍한 괴질로 사망한 상태였고, 그나마 살아남은 선원들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후 이탈리아 전역에서 순식간에 같은 증상의 감염자가 발생했다. 프랑스에서도 그해 연말에 처음 감염이 보고된 후, 이듬해에는 전역으로 퍼졌다. 이 끔찍한 전염병은 이내 이웃 남쪽 이베리아반도로 전파됐고 1349년에는 바다를 건너 영국을 덮쳤다. 불과 3년 뒤인 1350년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특히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에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 1352년까지 수천만 명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확산이 멈췄다고 한다. 페스트 대유행은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기 700년경 2700만 명이었던 유럽 인구는 1300년경 이미 7300만 명으로 급증한 상태였다. 하지만, 페스트와 기근으로 1400년경에는 450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유럽인들의 평균수명도 13세기에 35세였다가 페스트 창궐기에는 17세까지 급감했고, 1400년경에도 20세에 머물렀다고 한다. 전염병 하나가 인구의 급감, 농산물 수요와 영주들의 수입 감소, 농민들의 이동을 만들어냈다.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주검과 죽음의 공포는 이전에 가졌던 종교와 윤리 관념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됐다.
세월이 무척 흘렀고, 이제는 병원체가 세균인지 바이러스인지도 정확하게 알게 됐다. 하지만 전염병에 대응하는 우리의 방법은 여전히 큰 차이가 없다. 그 당시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골로 도피했고, 지금은 최소한의 사회적 접촉과 최대한의 인적 거리를 유지하며 생활하고 있다. 필자도 연구소와 집을 오가며, 점심도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있다. 저녁이 다가오면 오늘은 뭐 해 먹지 하는 아내 걱정을 대신 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주말이 아닌 저녁을 집에서 함께 했던 기억이 30여년 전 신혼까지 거슬러 간다. 물론 이후에도 평일 저녁을 집에서 먹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드물었다. 만남과 회의도 사라졌고, 그 많던 전자메일도 급감했다. 그러다 보니 연구에 집중하는 시간이 연구소에 처음 들어왔던 신입 때처럼 길고,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방해받는 일도 없다. 과학자를 희망하면서 꿈꾸었던 지극히 단순한 생활을 다시 가져다 준 것은 놀랍게도 코로나였다.
우리 사회는 앞으로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것이다. 대부분은 우리가 고통으로 감내해야 하고 그렇지만 또 예상치 못했던 변화들에 크게 상심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반문해본다. 미래 사회에서 과학자, 연구원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더 절박해진 상황에서도 나는 진정 필요한 존재일까? 코로나를 겪으면서 다시 발견한, '내가 진정 욕망했던 나 자신'이 이기적인 호사(豪奢)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으로 코로나가 준 뜻하지 않은 선물을 챙겨본다. 정영욱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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