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송대 송지연 초빙교수 |
보르헤스의 책을 잔뜩 시켰다. 논픽션 전집을 포함한 5권. 보르헤스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온 것치곤 수중에 그의 책이 너무 없다고 생각했다.
미로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자리에 앉은 후의 일이다. 검색하고 둘러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썼다. 미로를 찾다가 미로에 빠졌다. 이 글은 처음의 계획처럼 미로의 다양한 인문적 형태와 의미를 소개하는 글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 미로에 빠진 글이 될 예정이다. 물론 그 예정조차 장담할 수 없다.
당장 내일 아침 신문사에 글을 보내야 하는데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밤 11시가 넘도록 아기와 씨름하다가 겨우 재우고 자정이 지나서야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 수 있었다. 그 시간까지 미국에 사는 중국인과 영어로 전화 미팅을 마치고서는 효율적 재택근무를 위해 걸어 잠근 자신의 서재에서 걸어 나온 남편에게, 나는 내가 비싼 글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였다면 나의 일이 이렇게 취급받지 않았을 거라고 시비를 걸었다.
모두 잠든 시간 홀로 깨어 앉아 내가 아는 미로 모티프들을 중요도나 질적 대표성 따위 의식하지 않고 무작위로 나열해 보았다. <끝없는 이야기>의 천 개 문 사원 미로부터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의 미로까지. 그러다가 보르헤스를 시켰다. 자기계발 강연에 참석하기로 한 취준생, 진로 특강을 등록한 고3 같은 마음으로. 성공자 보르헤스 선생님 가르쳐 주세요.
다독의 시절을 졸업했답시고 까불곤 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직업이 되었으니 이제 더 이상 그게 즐겁지만은 않다는 진부한 얘기다. 좋아하는 걸 노동으로 삼으면 애정과 신비가 덜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봤자 그건 현재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런 내가 내 책이 한 권도 없는 이곳에서의 일상이 바로 그 이유로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좀 이상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래도 책깨나 읽었다 이건가.
불안의 근거를 지난 방만했던 방학 내내 찾아 헤맸다. 대전이 아니기 때문일까. 주말부부 생활을 한시적으로 청산하고 올라온 이곳에는 당연하게도 내 책상, 내 책장, 내 서재가 없다. 부엌에 딸린 테이블은 넓고 충분하지만 오른쪽으로 싱크대, 왼쪽으로 아기 미끄럼틀이 동시에 보인다. 시야가 생활에 압도되어 있고, 영혼은 감각에 매몰되어 있다. 이건 그냥 휴식시간마다 인터넷쇼핑을 하는 영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다는 표현들을 반성 없이 쓰지만 대부분은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미로 자체를 잃는다. 미로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고로 출구를 찾아 빠져나갈 필요도, 미로의 핵에 도달할 의지도 없다. 우울감에 젖어있다고 함부로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착각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미로를 정말로 본 적도 없으면서.
평범한 일상의 후면에 도사린 삶의 미궁이란 보이는 사람에게나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상상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이 중요해질수록 회의하고 궁구하고 탐색하는 미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든다. 사고의 구획과 의식적 방황에는 힘이 든다. 심지어 미드 웨스트 월드에서는 잔인하게도 캐릭터의 머리 가죽을 벗겨내어야만 미로를 볼 수 있게 설정되어 있더라. 어우 머리 아파.
비록 쓰다 만 논문이라도, 바로 그 쓰다 만 논문을 위해 펼쳐진 읽다 만 책들이, 마치 짓다 만 레고처럼 쌓인 그 쿰쿰한 골방이 정말로 내 정신의 근거지였던가. 아마도 거기 나의 미로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내 영혼은 독서실 메뚜기와 같은 상태다. 저기요, 제 자린데요. 학생증 없이 몰래 들어온 어느 대학 도서관의 열람실에 자리를 잡자마자 누가 다가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댄다. 조용하고도 재빠르게 일어나 비켜주어야 한다. 말이 좋아 창조적 유목이지 독서실 메뚜기 신세다. 영혼의 집이 역설적으로 미로라면, 나에겐 집이 없다. 길을 잃을 수도 없으니 메뚜기처럼 옮겨다니는 수밖에.
새하얀 종이에 검은 활자로 선을 그어 작고 별볼일 없는 미로 하나 지었다.
우송대 송지연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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