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퇴임하는 대전지법 신귀섭 원로법관. 사진=이성희 기자 |
34년간 법관으로 걸어온 그의 길을 보면 사법부 신뢰회복 방안이 담겨있다. 그는 기존의 판례나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한 사고로 사건을 해결해 나갔다. 아동 성추행 사건을 담당했을 때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심리하기 위해 놀이를 통한 실험, 상황극 등 새로운 심리방법을 도입했고, 대법원은 이를 제도화해 전국 법원으로 확대했다.
또 청주지방법원장을 지냈을 당시에는 청주지법에 가사과를 독립해 설치하는 등 법원의 발전을 위한 일에도 끊임없이 매진했다.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 법원 정기인사 시즌에 맞춰 퇴직을 결정했다. 퇴직에 맞춘 인사로 재판부가 갑작스럽게 변동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제는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신귀섭 부장판사에게 34년 동안 걸어온 법관의 삶, 앞으로의 활동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퇴직을 앞두고 있다. 심정은 어떤가.
▲처음 법복을 입었을 때가 1986년 3월 1일이었다. 이번 달 24일 퇴직하니 법관으로 5일 빠지는 34년이다. 아직 정년이 5개월 남았지만, 퇴직에 맞춘 갑작스러운 인사로 재판에 혼동이 올까 정기인사에 맞춰 퇴직을 앞당겼다.
그동안 34년 재판업무를 하면서 더 친절하게, 더 정성껏 재판에 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제 법원의 울타리를 벗어나 우리 대전과 충청 지역 주민의 권리를 신장하고, 지역 법률 문화의 발전을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법관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재판을 맡아왔다. 가장 중요시했던 원칙과 소신이 있었다면?
▲원칙과 소신은 선입견으로 재판하지 말고 당사자의 주장이 증거에 따라 거짓으로 밝혀질 때까지는 당사자의 말이 진실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경청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므로 기존의 판례나 관행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유연한 사고를 하고 재판에 임하는 게 원칙과 소신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재판이 있다면 무엇인가.
▲한 20년 전 목포지원에 근무했을 때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유치원 관계자로부터 강제추행 당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피고인은 범죄사실을 부인하고 피해자는 어린아이라 고생했었던 기억이 있다. 어린아이다 보니 피해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다 당시 사건의 상황을 추론할 수 있는 놀이, 상황극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아동 전문가인 한 대학교수의 도움을 받아 보조기구들을 통한 상황극 등 새로운 심리방법을 최초로 도입해 재판을 진행했다. 이 재판 이후 여성, 아동단체 등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고, 이 심리방법이 제도화돼 관련 재판에 활용되고 있다.
-청주지방법원장을 지냈다. 법원장으로서 어떤 업무에 주력했었나.
▲처음 청주를 가서 업무파악을 했다. 청주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정법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전은 가정법원이 있는데 말이다.
가정·소년 사건을 청주지법 가사부와 소년부에서 나눠 담당했고, 상담실이나 후견적인 치유에 관한 운영이 전혀 안 되고 있었다.
가사와 소년 사건의 특성상 일반 사건과 똑같이 다룰 수가 없어 전문성을 갖춰야 했다. 가정법원이 없기 때문에 충북도민들이 가사와 소년 법률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청주시 규모의 도시에서는 전문적인 법률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보완책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가정법원과 대전가정법원을 직접 다니며 자문과 벤치마킹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법원행정처에 여러 차례 요청해 가정법원은 아니지만, 가정법원에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아동관찰실 등 시설을 마련했다. 또 민사과와 형사과에서 나뉘어 있던 가사담당 업무를 위해 가사과를 독립부서로 만들었다. 이 일을 하는데, 거의 2년이 걸렸다.
-대전지법에 법원장 후보 추천제가 최초 도입됐다.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대전지법의 경우 지난해 의정부지법과는 다르다. 지난해 의정부지법은 단수 추천이고 대법원장의 선택권이 아예 없었으며, 기수가 너무 낮았다. 이런 측면에서 대전지법원장 임명 과정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에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번엔 후보를 여러 명 추천해 대법원장의 선택권을 넓혔고, 기수도 조정했다. 낮은 기수 문제만 언급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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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를 꾸짖는 국민의 여론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다. 다만 어떠한 재판에 대한 진영논리나 이해관계에 따라 명확한 근거도 없이 비난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사법부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은?
▲그동안 법원에서는 신뢰회복을 위해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한다든지, 친절한 법원을 만든다든지 등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 왔지만, 법원의 신뢰는 향상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런 노력보다는 모든 법관과 직원들이 진심으로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제도적으로는 배심제 등을 통해 국민의 사법제도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신뢰 제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법관에 대한 신뢰도 중요하다고 본다. 평생 법복을 입어온 선배로서 후배 법관들에게 당부할 말은?
▲후배 법관들 모두 많은 고생을 하고 있기에 선생님같이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그러는 건 아닐 것 같다. 꼭 당부해야 한다면 사법부 신뢰 회복 방안과 같은 말을 전하고 싶다. 국민의 이야기를 최대한 경청하고 존중해 재판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법원에 원로법관 제도가 있다. 원로법관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재의 원로법관 제도는 고위법관들이 그동안 쌓아온 경륜과 경험을 사장하지 않고 이를 활용하는 제도로 좋은 재판을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본다. 아직은 원로법관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성과를 말하기에는 이르지만, 상당히 좋은 제도인 것 같다.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은?
▲오랫동안 법관의 길을 걸으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앞으로는 지역 주민들의 법률 서비스를 위해서 최선을 다 할 생각이다. 앞으로의 변호사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
대담=윤희진 경제사회부장·정리=김성현 기자·사진=이성희 기자
▲신귀섭 대전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신귀섭 부장판사는 1983년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해 제25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15기)을 거쳐 법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서울형사지방법원, 서울민사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서울고등법원 등을 거쳤다.
2000년 이후부터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부장판사,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지원장, 대전지방법원 부장판사,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장을 지냈다.
2008년에는 대전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2010년 대전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2013년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제53대 청주지방법원 법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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