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가 시작된 용문123지구. 사진=여상희 작가 |
늙은 별의 최후는 소멸, 낡은 집의 말로는 철거다. 소멸한 별의 기억은 수 만 년을 달려와서라도 끝내 우리 곁에 도달하지만, 먼지 속에서 폭삭 주저앉아 버린 집의 기억은 되새겨 볼 방도가 없다.
골리앗의 펀치 닿자 툭툭 30년 전 우리 집이… 툭툭 50년 전 뛰어놀았던 골목이… 한 시대가 사라진다. 대전은 조금 빠른 속도로 무너져 가는 중이다. 기억될 기록은 없다. 정훈 시인의 고택이 그러했고, 소제동 철도관사촌이 그럴지도 모른다.
재개발과 도시재생은 결코 부정사가 아니다. 침체 된 도시를 일으키는 시의적절한 선택에 오히려 가깝다. 다만 기억과 보존을 재개발과 도시재생에 대입해본다면 같은 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거다.
그러나 이제는 재개발이라는 딱딱한 명사에 감성과 온기를 불어넣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자발적 소멸이라는 최후를 맞이했을 때, 가슴 벅찬 반짝임으로 남고자 하는 일말의 욕심이다.
중도일보는 2020년 연중 기획 시리즈 '대전기록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재개발과 도시재생으로 사라질 위기에 직면한 동네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버리고 남길 것을 선별해 기록물과 물리적 유산이 보존될 '메모리존(가칭)'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대전은 히스토리가 없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할 스토리텔링의 단서도 없다. 대전시 승격 100년을 앞둔 지금 '기록'을 위한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이는 훗날 오롯이 대전에 남겨질 문화유산이자, 수년이 지나도 밑천이 드러나지 않을 히스토리의 출발점이 되리라 믿는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도시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
2. 무너지는 도시, 대전이 사라진다
3. 다가오는 재개발, 그들의 이야기
4. 도시재생의 끝은 '메모리존'
5. 정체성 없는 대전, 100년을 준비하자
지난해 철거된 목동 3지구 모습. 사진=여상희 작가 |
그래서 더욱 귀했다. 굴욕적인 시대를 방증하기에 대전이 가진 근대 문화적 요소는 꽤 풍부했었다. 그러나 수년 사이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느낀다. 뾰족집이 제자리에 있고 정훈 고택이 남아 있던 그때와 소제동 관사촌이 무너지고, 목동 선교사촌이 철거된 지금은 그때와는 달라졌다.
대전에 있는 몇몇 근대문화유산은 일방적 소멸이라는 최후를 맞았다. 일부는 재개발에 휩쓸렸고, 일부는 보존 가치를 몰랐던 무지함으로 무너졌다. 대전의 '히스토리'는 이렇듯 허무한 이유로 사라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눈에 보이는 근대 유산만의 문제는 아니다. 도시의 주체인 대전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히스토리도 흔적없이 소멸한다.
지난해 여름 대전시 중구 목동 3구역이 철거됐다. 이곳에는 250여 채의 주택이 있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하숙집, 목원대가 후원해 지은 선교사촌, 1세대 건축가가 설계한 집, 연대를 알 수 없는 오래된 피아노, 그리고 수많은 삶의 흔적들이 발견됐다. 근대와 현대의 역사가 점철됐던 목동 3지구의 기록만 보더라도 '도시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꽤 선명한 지표들로 설명된다.
목동 3구역 지역리서치 사업에 참여한 여상희 작가는 "헐리고 헐리다 보면 별거 아닌 도시가 될 게 뻔하다. 가치 있는 유산이 나온다면, 현장보존이 어렵다면 해체해서라도 보존하려고 노력할 때"라고 강조했다. 별 게 아닌 도시와 별 게 있는 도시는 결국 어떻게든 보존하려는 노력, 그 한 끗 차이라는 얘기다.
2019 지역리서치 사업에 남겨진 목동 3지구의 영상기록물 |
2019 지역리서치 사업에 남겨진 목동 3지구의 영상기록물 |
경남 창원시는 도시를 기록하는 선례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창원시는 옛길과 문화유적을 보존한다는 도시환경 정비 조례에 맞춰 재개발 구역 4곳에서 전시와 조형물 형태로 '지역 흔적 남기기'를 완성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인천본부도 가로주택 정비 지역에 지역 흔적 남기기를 추진 중이다.
대전시도 첫발은 뗐다. 2015년과 2019년 지역리서치 사업으로 재개발을 앞둔 지역의 기록을 남기려는 시도를 해왔고 올해도 소제동과 삼성동을 중심으로 기록사업을 추진한다. 다만 조사 과정과 결과물 공유, 보존 부분에서는 여전히 일회성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전시와 학계 전문가들은 본보가 제안한 재개발 구역 내에 세워질 가칭 '메모리존'에 대해 공감했다.
김용각 대전시건축사회장은 "전수조사를 해야 하는 몇 군데만 살펴봐도 근대 건축 등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다. 대전의 지역성을 나타낼 수 있는 것들인데, 민간 개발이다 보니 보존 방안이 아쉬운 시점"이라고 말했다.
안준호 대전시 문화유산과 팀장은 "재개발 지역에서 나온 기록과 유산을 메모리존으로 남겨 만들고 보존한다면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며 "올해부터 시·도마다 지방등록문화재를 지정할 수 있다. 메모리존을 근대건축물로 활용한다면 상징성, 기록성 측면에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는 "재개발에 앞서 보존 가치가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며 "개발로 변하고 난 뒤에 여기가 어떤 장소였는가 떠올리는 기억의 잠식은 더 이상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 동네는 볼 것도, 남길 것도 하나없어." 재개발 구역의 사람들은 동네가 사라지는 허탈함을 가슴에 혹은 뼈에 묻고 마을을 떠나고 있다. 각각의 삶은 가슴에 남겠지만 한 시대를 함께 한 우리 모두의 삶의 궤적은 우리가 살았던 바로 '그곳'에 새겨야 한다.
이해미·김성현·이현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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