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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 때 복학한 나는 다시 기숙사에 입사했다. 일 년만 잘 버티면 졸업할 수 있다는 희망에 순조롭게 적응했다. 아니, 즐거웠다. 왜냐면 기숙사에서 후배 H를 만났기 때문이다. 어쩌다 친하게 된 후배도 4학년이었는데 나랑 죽이 잘 맞았다. 무엇보다 후배도 뭐든 잘 먹었다. 그때 우리는 완두콩이 들어간 야채참치 캔을 무지하게 먹었다. 후배 가방엔 항상 참치 캔이 들어 있었다. 캠퍼스 벤치에 앉아 놀다 불쑥 참치 캔을 꺼내면 둘은 나무 젓가락으로 참치를 먹었다. 졸업 후에도 우리의 먹보 의리는 이어졌다. 딱히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닌데도 케이크를 사다 먹곤 했다. 크라운베이커리 삼단케익. 수저로 퍽퍽 퍼먹는 맛은 봄밤의 입맞춤처럼 황홀했다. 내가 후배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었다. 레간자. 자동차 '레간자'의 광고 카피가 '소리없이 나간다'였는데 후배는 정말 소리없이, 빨리 먹었다. 자기 몫만 후딱 먹고 수저를 놨기 때문에 나랑 아귀다툼할 일도 없었다.
각설하고, 열 시 점호가 끝나면 기숙사 안에선 자유로웠다. 나는 후배 방에 뻔질나게 놀러갔다. 후배 방 식구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배고파지기 마련. "언니, 라면 먹고 갈래요?" 응? 그날 후배는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꺼냈다. 방에서 라면을 끓이자면 천상 커피포트밖에 없었다. 하지만 커피포트는 전기세가 많이 나와 절대 사용하면 안 되는 거였다. 우리는 키득거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거사에 돌입했다. 봉지를 재빠르게 찢어 물이 끓는 커피포트에 짜파게티와 라면을 투하했다. 수프와 짜파게티 소스도 한꺼번에 넣었다. 국적불명의 라면이 탄생했다. 요상하면서 맛있는 냄새가 방안에 퍼졌다. 다들 침을 꼴깍 삼키며 게슴츠레한 눈이 먹잇감을 찾은 독수리눈처럼 번들거렸다. 나는 커피포트 뚜껑, 나머진 라면 봉지를 접어 손에 들었다. 나무젓가락도 모자라 반으로 분질렀다.
네 여자는 허겁지겁 '짜파구리'를 흡입했다. 가슴은 콩닥거리고 입에선 후루룩거리고. 훔친 사과가 맛있다고 했나? 몰래 먹는 짜파구리 맛을 무엇에 비할까. 금기에 도전하는 짜릿함이 이런 걸까? 하지만 신은 너그럽지 않았다. 라면을 다 먹고 국물을 나눠 마시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거 무슨 냄새지?" 사감 선생의 보름달 같은 얼굴이 훅 들어왔다. 우리는 사색이 돼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후배의 룸메이트가 얼마나 놀랐는지 숨는다는 게 벽장 속에 머리만 집어넣었다. 흡사 풀섶에 대가리만 숨은 꿩같은 꼴이었다. 근엄한 사감은 그걸 보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었다. 웃음을 선사한 덕분에 사감은 커피포트만 압수하는 데 그쳤다. 항상 커트머리에 이쁜 꽃핀을 꽂고 가을이면 캠퍼스를 거닐던 사감 선생. 아! 우리의 사랑스런 'B 사감'과 짜파구리 나눠 먹던 후배들은 다 어디 갔을까.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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