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종학 교수 |
이런 모습은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다는 로스쿨에서의 수업 풍경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다들 공부깨나 하던 학생들이고 머리 좋다는 소리를 많이도 들어왔던 학생들이건만 질문이 없는 것은 종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아니, 같은 정도가 아니라 질문을 많이 하는 교수의 수업은 은근히 회피하려 하는 경향마저 있다. 이제 대답조차도 부담스럽다는 모습이다.
이런 경험은 외국에서의 유학 경험이 있는 선생들에게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이들 선생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과 선진국 학생들의 차이점으로 거론하는 것이 바로 한국 학생들의 질문 회피 모습과 외국 학생들의 자유로운 질문 풍경이다.
필자도 1년간 청강생으로, 또 다른 1년간은 방문 학자로 외국 대학을 짧게나마 경험한 바가 있다. 청강생으로 수업에 참여하였을 때 필자가 느낀 가장 큰 곤욕스러움도 바로 교수의 쏟아지는 질문이었다.
언어 부족 탓도 있었지만 이러한 수업 풍경은 필자에게는 너무도 낯선 모습이었기에 혹시나 필자에게 질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고개 들어 교수님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교수님의 시선 회피에만 급급하였던 추억이 지금도 얼굴 벌게지는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있다는 것이고, 기존의 생각이나 판단과는 다른 묻는 자만의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대답만 한다는 것은 기존의 판단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는 것이요, 지적 호기심이 없음은 물론, 자신만의 생각은 더더욱 없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질문이 중요한 것이다. 질문하는 사회는 열린 사회요, 미래로 가는 사회이다. 반면에 질문 없는 사회, 대답만 하는 사회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정체 사회요, 닫힌 사회이다. 그러기에 선진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가 취할 방향은 질문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일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쉽지 않은 과업이다. 필자는 수업 시간에 많이 질문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졸업생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 중의 하나가 "교수님 수업은 질문이 너무 많아 상당히 부담스럽다."라는 말이다. 우리가 대답만 할 줄 아는 사회에서 질문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극명하게 시사하는 말이리라.
그런 점에서 '질문'과 '대답'은 같은 차원의 등가성이 유지되는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답하는 사회와 질문하는 사회는 어쩌면 클래스가 다른 차원의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즉 조금 노력한다고 '대답사회'에서 '질문사회'로 넘어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사회 전체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종합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방안을 강구하지 않고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일지도 모른다. 이는 지금 단계에서 선진 사회 단계로의 진입 목표가 꿈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생각 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철학자 최진석 교수가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는 책에서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기능이 아니라 인격이다. 질문과 대답은 대립적인 한 쌍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두 행위다."라고 갈파한 것은 탁견이다.
우리 사회, 아니 필자의 가슴 속 부끄러움을 드러내기에 아프다. 그 부끄러움 잊고자 대답만 할 줄 아는 사회에서 질문이 차고 넘치는 사회로의 이동이 이루어지는 2020년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3월의 첫 수업부터 학생과 교수 사이에 질문이 넘치는 수업을 시도해 보리라.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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