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실 그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천민인 광대가 하루아침에 임금 노릇을 하게 된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 암흑가 조직의 2인자, 마적단 두목, 정치깡패, 복서 출신의 건달,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 관료까지. 그는 빈 채로 채우면 무엇이든 되는 놀라운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한국 영화뿐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는 눈빛으로 많은 것을 말합니다. 마음의 창이라는 눈. 배우가 한 인물을 연기할 때 접근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습니다. 인물의 이력, 그를 둘러싼 상황, 동작, 관계성 등. 배우 이병헌은 그 무엇보다 그 인물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 품어 눈으로 드러냅니다. 처연하게, 숙연하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한없는 슬픔을 담아서 카메라를 응시합니다.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그의 눈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당신도 그렇잖은가? 외롭지 않은가, 억울하지 않은가, 괴롭지 않은가 하고 묻는 그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하여 그의 연기는 강력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생각납니다. 4·19 혁명 당시 젊음의 열정을 잃고 무기력한 소시민으로 변해 버린 중년의 비애를 담은 노래입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5·16 군사 쿠데타 혁명 동지들의 분열과 비극을 다루는데 정서와 분위기가 이와 유사합니다. 조국 근대화라는 대의는 빛이 바래고 권력에 대한 집착과 탐욕만 남았습니다. 김규평은 '혁명의 배신자'라는 회고록을 쓴 친구와 지도자를 죽이고 종국에는 자신도 형장의 이슬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일이 있다면 4·19 1년 만에 5·16이 벌어진 일일 것입니다. 그토록 열망했던 민주주의를 군사 쿠데타 세력에 저항 없이 내어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은 정치를 다루지만, 스타일은 느와르 영화를 닮았습니다. 마피아 조직의 분열과 폭력을 그린 <대부> 시리즈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에서 보았던 허무한 정취가 가득합니다. 박통과 김규평이 조촐한 술자리를 벌여놓고 일본말로 나눈 대화가 기억납니다. "그때가 좋았어." "그때가 좋았습니다." 지난 세월에 대한 곡진한 회한이 묻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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