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은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 ~ 1519, 이탈리아 예술가)의 「모나리자」요, 애호가가 가장 많은 인기 화가가 밀레(Jean-Fran?ois Millet, 1814 ~ 1875, 프랑스 화가)라고 언급한 일이 있다. 사랑 받는 것은 가치와 별개다. 가치 또한 금전적 가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금전적 가치 역시 한 가지 기준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금전적 가치도 논하기 어렵다. 2014년 기준으로 쓴 이규현의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보면 폴 세잔(Paul C?zanne, 1839~1906, 프랑스 화가)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다. 놀라지 마시라. 무려 25억 달러이다. 100위 내에 가장 많은 작품을 올린 화가는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1881 ~ 1973, 스페인 출신 화가로 프랑스에서 사망)이다. 15.5억 달러로 2위에 오른 「꿈」을 시작, 물경 15작품이나 된다.
피카소가 세상을 하직한 것은 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급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필자는 중학교 때부터 동양화를 했다. 보는 것 또한, 그리고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공부이다. 시골에서 전시장을 돌아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도서관에 비치된 도록을 여러 차례 보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동양화는 정신이나 운필을 중시한다. 외형적 변화가 적다. 그러다 보니 누구 작품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쉬움 반, 무지가 반이겠으나 끊임없는 창작력, 작가정신을 쉽게 읽어 낼 수 없었다.
피카소 작품의 끊임없는 변화와 미적 담론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열어주며,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고, 그늘을 개선하려는 치열한 작가정신이 마음에 와 닿았다. 열정도 대단하여 5만여 작품을 남겼다. 미적추구의 절실함이 아니고는 불가한 일이다. 정신뿐 아니라 그가 추구한 다양한 기법과 매체도 귀감이 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작품은 논문을 쓰는 것이요, 논문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급우들과 함께 서울 전시회에 갔다가 우연히, 석전 황욱(石田 黃旭, 1898 ~ 1992, 서예가) 서예 개인전을 보게 되었다. 전시장 전체가 용트림하는 것이 아닌가? 도록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석전 제자가 대전에도 있으나 아직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후에 서첩과 자료를 수집하여 서체를 흉내 내 보았다. 될 리가 없었다.
석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3년 75세 때라 한다. 가까이에서 그의 놀라운 글씨를 지켜보던 전주지방 유지들이 초대하여 주었다. 회혼기념서예전이었다. 1974년 문예진흥원미술관에서 열린 동아일보사 후원 서울 작품전을 시작으로 1991년까지 매년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한다.
악필서법(握筆書法)으로 유명하다. 주로 행초서 작품이 보인다.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기세와 무기교의 순박함이 돋보인다. 단순하고 독특한 운필과 운율이 가히 독보적이다. 초탈의 경지를 보여준다.
소시부터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 필법 중심으로 서예공부를 시작, 꾸준히 서예를 하는 한편 6예(六藝 - 禮, 樂, 射, 御, 書, 數)를 익히며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1960년경부터 수전증으로 붓 잡기 어렵게 되었다. 왼손바닥으로 붓대를 잡고, 엄지로 꼭지를 눌러 운필하는 자신만의 악필법을 개발하였다. 즐거움 이면에 절실함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절실함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불편함이 절실함을 낳기도 한다.
얼마나 절실하게 세상을 살아내고 있을까? 자문하게 되는 아침이다. 정치인들에게도 묻고 싶다. 얼마나 절실히 나라를 사랑하는가? 절절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는가?
문득문득 우리 사회 기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예부터 가장 좋은 정치는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라 했다. 정치얘기로 온 국민이 뜨겁다. 자기 일에 열중하는 것이 최상이다. 복지제도는 맞는 것일까?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81 ~ 1989, 미국 40대 대통령)은 "복지혜택을 많이 받지 않는 것이 복지."라 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간접 민주주의로 가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를 선호하는 듯한 행태는 무엇인가? 아직도 자신들이 성장기에 가졌던 눈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고 일어나면 변하는 세상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세상이다. 보다 절실하게 세상을 마주하자.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