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재 동화 표지 |
김호연재(1681~1722)는 조선시대 고성군수를 지낸 김성달의 딸이자 소대헌 송요화의 아내다. 친가와 시가 모두 당대 손꼽히는 명문가로 김호연재도 문학수업을 받은 여성 작가였다. 김호연재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는데 외로운 시간 속에서 늘 친정과 형제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표현한 작품들이 많았다.
여성이었고 규방 사람이라는 한계 속에서 김호연재는 문학인이지만 세상 밖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이는 시에도 드러나는데 '자상'이라는 시에서는 '깨끗하기는 흰 구름 같네 / 화려한 물건을 즐겨 하지 않고 / 뜻은 구름과 물 흔적에 있네 / 세속의 무리와 더불어 합류하지 않으니 / 세상 사람들이 도리어 그르다 하네 / 스스로 규녀의 몸임을 슬퍼하니 / 푸른 하늘은 알지 못하리로다 / 어찌하여 할 바가 없으리오 / 다만 능히 각각 뜻을 지킬 뿐이라네'라고 노래했다.
김호연재는 42년 동안 200 작품을 남겼지만,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과 비교해 작품이나 인물에 대한 재조명이 드물었다. 대덕구와 대전 문화계는 김호연재의 가치를 발굴하고 브랜드화할 계획이다. 대덕구는 김호연재 문학상을, 문학계는 대전과 연고가 있는 여성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사업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한편 충남대 예술대학 회화과 윤여환 교수는 지난해 김호연재 영정을 제작했다. 영정 제작과정에서 김호연재 직계후손을 모두 만나 표준용모 우성 유전인자를 조합해 김호연재의 용모를 잡아가는 과정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방송되기도 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 |
단재 신채호의 출생지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이다. 현재의 대전시 중구 어남동 일대로 생가터가 있는 곳이다.
신채호는 태어난 대전에서는 8년을 채 살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청주로 이사가면서 대전과의 인연은 꽤 짧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울과 중국, 블라디보스톡, 상해 등 각국을 돌며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뤼순 감옥에서 눈을 감았다. 신채호는 언론인이자 역사가,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신문과 매일신문, 황성신문을 통해 자주, 민권, 자강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는 간부로도 활동했다. 영국인 베델이 사주였던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논설진으로 참여해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한다. 안창호, 이갑, 이종호와 함께 중국 청도에서 신민호 동지들과 독립운동 방향을 논의했다. 이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 모임에 참가했으나 의정원회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이를 반대하고 퇴장했다. 같은 해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를 통합해 통합 임시정부로 발전할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의 요청을 받아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해 온갖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라고 선언하며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역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는 1924년 집필됐다. 이후 단재는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졌는데 대만에서 외국위체를 위조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행동에 나섰다가 결국 뤼순 감독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옥사했다.
대전시는 ‘대전방문의해’를 맞아 단재 신채호 선생을 대전의 대표 인물로 브랜드화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지난해 마당극과 연극으로 올해는 합창으로 단재 선생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지난해 11월에는 서대전공원 일대에 단재 선생의 동상을 제막하기도 했다.
구두 제작소를 개조한 파리 근교의 프레 생-제르베 작업실에서 작품을 하고 있는 고암 이응노. |
대전에는 고암 이응노 선생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있다. 오로지 고암을 위한 고암에 의한 작품 전시와 연구에 몰입하는 '이응노미술관'이다. 고암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동양화가로 이후 조각, 콜라주 등 동양화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1958년 고암은 프랑스로 건너간다. 서독에서 체류하며 박인경 화백과 부부전을 열었고, 전통 필묵과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흐름이었던 앵포르멜을 결합해 동양적 감수성이 가미된 새로운 추상을 창작했다. 1962년 폴 파케티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으로 고암은 당대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세계를 돌며 개인전과 그룹전을 50차례 열며 열정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며 대전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옥중에서도 작품을 쉬지 않았는데 약 300점의 작품을 남겼다. 사면 후에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고 문자추상을 완성해 나갔다.
고암의 대표작품은 역시나 군상이다. 1980년부터 1989년 작고 전까지 제작된 군상에는 작가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집약돼 있다는 평가다.
이응노미술관은 2000년 개관했으나 2005년 폐관했고 이후 2007년 대전에 이응노미술관을 개관한다. 개관 당시 문자추상과 군상 106점을 기증받았고, 2차 기증에서는 옥중화를 비롯해 101점이 추가 기증돼 2007년 개관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대전고암미술문화재단을 출범해 본격적인 인물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재단 설립 후에는 전시와 학술, 출판 등 국내외 예술 행보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이응노미술관은 2019년 새롭게 구입한 작품을 선보이는 신소장품전으로 올해 첫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이해미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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