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섭 교수 |
그러나 ‘손때 묻은’이라고 표현할 때 그 의미는 다르게 변한다. ‘손때 묻은 벽돌 한 장’ ‘손때 묻은 시골 라이프’ ‘손때 묻은 빈티지 가방’ 등의 뜻은 긍정적이고 뭔가 아련한 반향을 만들어 내는 느낌이다.
과연 손때가 무어라고 이렇듯 의미를 바꾸어내는 마법을 지니고 있을까? 다시 국어사전으로 돌아가 보면 ‘손때’란 ‘오랫동안 쓰고 매만져서 길이 든 흔적’ 또는 ‘손을 대어 건드리거나 만져서 생긴 때’라고 정의한다. ‘손때 묻은’이 주는 울림을 설명하기엔 다소 부족한 느낌이다.
미국에는 새로 산 구두를 대신 길들여 주는 직업이 있다고 하던데 주로 우체국 집배원이 그 일을 도맡아 아르바이트 업무로 활용한다고 한다. 처음 신는 구두는 특유의 딱딱함과 불편함으로 발에 맞게 길들일 때까지 일정 시간의 사용을 해야 하는 것 같다. 새로 산 옷, 새로 신은 신발, 새로 산 가구는 새것에 대한 구매의 기쁨도 잠시, 약간의 어색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새로 이사해 드는 집도 처음 얼마 동안은 낯설고 내 것 같지 않은 서먹함과 마주해야 한다. 손때 묻은 익숙한 물건들로 새집을 장식하는 이유는 빨리 어색함으로부터 새로운 공간에 정을 들이기 위함이다.
그런데 정을 붙이는 일이란 그 대상의 크기와 비례하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새로 산 물건이야 내 것으로 만드는 데 그리 긴 시간을 필요하지 않지만, 덩치가 큰 집이야 그만큼의 더 많은 시간이 들 것이고, 하물며 도시공간은 얼마나 긴 정붙임의 시간을 요구하겠는가.
‘장소와 장소상실(Place and Placelessness)’이란 책으로 유명한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공간(Space)과 장소(Place)의 차이를 소위 손때가 묻었는지로 구분한다. 공간이 실재하는 물리적 위치 또는 용적이라고 정의된다면, 장소란 그 물리적 위치에 인간의 기억과 정신세계가 투영돼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 공간이라고 구별된다는 것이다. 기술 중심적 가치관에 의해 현대의 도시공간이 장소를 획일화하고 정체성을 약화했다는 주장과 함께 장소성(Placeness)을 회복하는 일에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도 사물의 체계(Le systeme des objets)라는 책에서 현대인이 오래된 물건에 집착하는 이유를 잃어버린 전통과 진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바램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공간에 정을 들여 장소로 만드는 일은 관심에 기반을 두고 다분한 노력과 정성을 필요로 한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살아도 여전히 낯선 도시가 있는 반면, 잠깐의 여행으로 들른 도시가 친근하고 정감 있게 느껴지는 차이는 이렇듯 도시를 손때 묻은 사랑스런 장소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차라리 인간이 시간과 함께 도시공간에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어가는 경이롭고 자연스런 메커니즘에 스스로를 내맡긴 결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매력적인 장소들로 가득하다고 평가하는 유럽의 고풍스런 도시들도 과거 언젠가는 신도시로 낯설게 출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손때 묻은 장소로 공간을 바꾸어 갈 것인가다.
대전은 비교적 젊은 도시다. 천년고도는 아니더라도 오랜 도시로서의 역사성이라든지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도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근대도시로 출발해 과학도시로 발돋움하면서도 오늘도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는 청년도시다. 도시역사가 길지 않다고 하여 손때 묻은 흔적이 적다고는 말할 수 없다. 손때는 조상의 것도 있지만, 현대인의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시재생사업지구에서는 대전사람의 손때 묻은 공간을 잘 보존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개발사업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도시공간에도 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질 수 있도록 배려하고 계획하는 정책적 지원도 따라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물리공간에 의미를 묻히고자 하는 바는 행복과 친근함을 입히고자 함과 동시에 도시공간의 과거와 미래에 대전다운 영원함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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