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기호는 영원한 진리일까, 허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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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향기] 기호는 영원한 진리일까, 허구일까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 승인 2020-01-16 08:16
  • 이해미 기자이해미 기자
9788932906751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 역사학자, 인류학자, 미학자, 건축학자, 문학평론가 등 수많은 타이틀이 붙는 움베르토 에코는 누가 뭐라 해도 기호학자다. 그는 볼로냐 대학 도서관의 모든 책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한 번 읽은 책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22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을 소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중세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그에게 붙은 수많은 타이틀 만큼이나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한 다독가로도 유명하다. 개인 장서만 해도 5만 권이 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독서의 신'이라 할 만하다. 이탈리아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 9개 언어에 능통했고, '살아 있는 인간 도서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나이가 들어서도 왕성한 기억력을 자랑하며 84세까지 저술활동을 했던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언제나 젊은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데, 책을 읽으면 기억력이 좋아지고 엄청나게 다양한 개성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 삶의 마지막에 가서 수없이 많은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건 굉장한 특권이지요."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많은 명작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은 '장미의 이름'이다. 숀 코네리 주연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이 책은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가 제자 아드소와 함께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을 추리소설 형식을 빌어 쓴 것이다. 플롯 자체는 보통 탐정소설이나 다름없기에 그리 특이할 것은 없지만, 이 책을 단순히 추리소설이나 중세의 신학 또는 근대철학의 논쟁을 다룬 책쯤으로 여긴다면 저자가 무덤에서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다. 소설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중세나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과 신학적 논쟁, 소설을 쓰게 된 신비한 경험 등은 모두 따분하기 그지없는 기호학을 흥미롭게 풀어내기 위한 하나의 소재에 불과하다는 걸 눈치채야 이 소설의 진가를 맛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장미의 이름'은 기호학 교과서인 것이다.



기호는 어떤 사물을 대신해서 보여주는 징후나 신호, 암호, 부호, 문자 등을 가리킨다. 기호에는 자연기호와 인공기호가 있다. 에코는 이 소설에서 주로 인공기호를 다룬다. 이 책을 처음 읽는 사람이나 이미 한 번 읽어본 사람도 '기호'라는 단어를 눈여겨볼 것을 권한다. 처음에는 기호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문장에 밑줄을 치면서 읽어보고, 두 번째 읽을 때는 기호라는 단어는 들어있지 않지만, 기호를 암시하는 문장을 윌리엄과 아드소가 하는 말을 중심으로 찾아보기 바란다. 이렇게 읽으면 소설 곳곳에서 기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가 대놓고 기호를 정의한 문장은 572쪽에 나온다.

"관념은 만물의 기호요, 형상은 기호의 기호, 관념의 기호인 것이다."

소설 제목이 왜 하필 "장미의 이름"인가? 인간은 모든 사물에 이름을 붙이려고 한다. 성경 창세기에도 신이 인간을 창조해놓고 처음 시킨 일이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일 아니었던가? 이름은 사물을 대신해서 의사소통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인공기호다. 에코가 쓴 소설, '장미의 이름'도 하나의 인공기호이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 불타는 장서관도 하나의 거대한 기호이고, 아드소가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도 기호학이다. 이 책을 읽고 기호가 영원한 진리가 아니고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허구임을 깨달았다면 여러분은 이미 움베르토 에코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을 이해한 것이다.

강신철 교수
/강신철 희망의 책 대전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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