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한 대전소방본부장 |
그와 달리 시민들이 신뢰하는 직업군에는 소방공무원, 군인, 간호사, 환경미화원 등 눈에 보이는 물질적 기준보다 직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숭고함·믿음·친근함이라는 정서적 가치가 우선시 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시민들이 신뢰하는 직업군에 1·2위는 항상 소방공무원이 자리 잡는 조사결과를 보면 한국인은 생명이나 건강에 이바지하는 직업군을 대체로 신뢰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재나 재난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사람을 구조하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방공무원의 모습은 일반 시민들의 감동을 끌어내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든든한 시민의 수호자, 슈퍼히어로 소방공무원들이 시름시름 병들어가고 있다면, 사람들은 믿을 수 있을까?
대다수 시민은 소방공무원들의 노고와 희생정신을 높게 기리고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술에 취해 자제력을 잃고 자신을 구하러 온 소방공무원에게 욕설을 내뱉고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밝은 낮 맨정신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밤이 되면 돌변해 주먹을 휘두르고 우리를 좌절감에 빠트린다.
아무리 훈련으로 육체를 단련시키고 마음 근육이 튼튼한 소방공무원이라도 이런 부류의 악질민원인에게 시달리다 보면 현장활동에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소극적인 대처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소수 불량한 시민들의 무책임한 행동들로 인해 선량한 다수의 시민이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서글픈 현실에 현장 활동하는 소방공무원들이 정신적 트라우마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우울감은 알게 모르게 점점 스스로를 잠식해 나간다.
시민들이 믿고 의지하는 슈퍼히어로가 차츰차츰 병이 들어가고 임계치를 넘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20세기 초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고통받던 미군 병사들의 편지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쓰여있다.
'입대하면서 나는 악마를 없애겠다고 맹세했어, 나는 일본인이 악마라고 생각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지. 그런데 말이야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어, 악마는 나였지, 나는 악마를 없앨 거야', '나는 그동안 미국을 위협하는 적을 죽인 게 아니야, 난 그동안 나를 죽여 왔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죽는 걸 보고 내가 살았다는 걸 안도하고 있을 때 내가 정상이 아닌 걸 알았어', '난 죽어서 천국에 갈 거야 지금까진 지옥에서 시간을 보내 왔으니까' 등등.
생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공포, 극한의 스트레스와 싸워야 했던 군인들의 고뇌가 글로 실감 나게 전해진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 불리는 이러한 정신적 질병은 육체적 질병과 달리 회복속도가 매우 더디다. 그리고 후유증이 크게 남아 완치가 힘들고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까지 고통받아 극단적인 선택까지 할 수 있는 무서운 질병이다.
소방공무원의 대다수가 경험이 있다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이 사회에 얼마나 큰 손실을 줄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여태껏 재난의 최전선에서 묵묵히 시민의 안전을 지켜왔던 '라스트맨 스탠딩' 소방공무원, 이제는 국가와 국민이 나서서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김태한 대전소방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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