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토론 없이 권모술수만 난무하는 연말 정국을 바라보자니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 다양성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망한다. 독불장군이 있다면 이미 세상이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이미 사회가 아니다. 양지가 그늘을 없애려 한다 하여 없앨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연유일까? 매년 교수신문이 뽑아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가 '공명지조(共命之鳥)'이다. 두 개의 머리를 갖고 한 몸으로 태어난 새가, 좋은 열매를 먹는 한 머리에 질투를 느낀 다른 한 머리가 독과를 먹여 죽게 하였더니, 둘 다 죽게 되었다는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이야기라 한다.
사자성어를 추천한 영남대 최재목 교수는 선정 배경을 "한국의 현재 상황은 상징적으로 마치 공명조를 바라보는 것만 같다. 서로를 이기려고 하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어느 한 쪽이 사라지면 죽게 되는 것을 모르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들어 선정하게 됐다."라 했다.
생각이 다르면 적인가, 악인가? 같으면 한 몸 아닌가?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라 하는 것이다. 잘못된 선거문화가 생산해 내는 왜곡된 사회현상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암흑사회, 무섭지 않은가? 정치판에서 뿐 아니라 사회가 온통 불통, 절벽임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소통의 중요성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빛과 물, 공기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단절, 그를 해소하기 위한 첫 번째 노력이 토론이다. 토론은 생각이 서로 다른 상대와 공평하게 의사소통 하는 구조를 말한다. 토론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유의해야 할 중요한 하나가 있다. 토론은 자기의 논점을 상대에게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토론은 자기의 논증을 비판적 시각에 의해 검토하는 일이다. 공평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일이다. 그를 통하여 경쟁하며 협력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새로운 생각을 탐색하고 고무하는 일이 토론임을 명심하자.
주장에는 논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러한 논증들이 서로 충돌하고 확대되어 상호 활발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개별 논쟁이 더 큰 논제를 생산해 내고 서로 관계를 맺게 한다. 이것이 토론의 기승전결이다.
토론이 아니더라도 사회분야 대부분 피드백과정을 거친다. 예술분야에서는 합평회라고 하는 것을 한다. 물론 합평회도 방법, 장소, 참여자 등에 따라 형식이 다양하다. 공통되는 내용으로, 유독 소통이 없는 정치판에 화두를 던지고자 한다.
합평회에 나오기 위해서는 모두 각자의 작품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물론, 특정 작품이나 주제, 소제를 가지고 할 수도 있다. 남의 것을 들여다보는 만큼, 자신도 보여주어야 한다. 품평해야 할 것이 작품이지 작가가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대부분 토론장에서 토론 사안이 아닌 인신공격을 종종 보게 된다. 설령 자전적 작품이라 해도 작가 명을 부르지 말고 서술자로 객관화하여 토론하는 것이 좋다.
가학적, 부정적 논평은 삼가야 한다. 오히려 장점 찾기에 주력하여야 한다. 아무리 초보 작품이라도 개성과 빛은 있기 마련이다. 가능성도 있다. 작품의 질적 차를 인정한다 해도,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인생과 철학, 나름의 세계관이 담겨있다. 마땅히 존중해 주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부정적 논평이 있다고 하면 아주 정중해야 한다.
시간과 순서를 지켜야 한다. 토론은 남의 말을 듣기 위한 것이지, 내 말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상호존중과 신뢰는 필수이다.
스스로 수준 높은 안목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토론장에 왜 나와 있는지 조차 몰라서야 되겠는가? 상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함께하는 것이다. 여타 작가의 퇴고나 개작에 도움이 되려고 합평하는 것이지, 자신의 지식자랑이나 자기주장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내 작품을 논평 할 때는 침묵하는 것이 좋다. 해명하고 항변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듣는 토론의 생명은 시야와 상상력 확대에 있다. 메모만 열심히 하자.
합평 도중에 견해가 바뀔 수 있는 것이 좋은 합평회 아닐까? 라틴 속담에 '음식 맛을 가지고 다투지 말라'가 있다 한다. 애초 다를 수밖에 없는 주관적 일로 어찌 시비를 가릴 수 있겠는가?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통분모, 보편적 공감대를 찾아가는 것이 인간사 아닐까? 명작은 시공을 초월해 공감을 획득한 것이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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