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내가 내게 했던 패기 좋던 약속들을 지킨 것이 하나 없다. 책을 많이 읽지도 못했고, 다양한 사람들 만났지만 가끔은 의도치 않게 아픔도 줬다. 무뚝뚝한 말투를 고치려 했으나 무심코 튀어나온 날선 말에 상처 입은 사람도 있을 거다. 내 부주의로 약속도 어겼다. 내 탓인데 다른 핑계를 대며 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운전하며 화도 참 많이 냈다. 깜빡이를 켜지 않은 끼어들기 차량이 얄미워 비켜주지 않은 적도 더러 있다. 당혹스럽다 못해 참 막살았구나 싶다. 어쩌면 생각하는 대로 산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대로 생각했던 건 아닐지, 반짝이는 시간을 참 멋없이도 살았다. 그래도 이젠 미련없이 잊어버려야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그 사람들과 유대감을 쌓는 일은 무엇보다 행복하다. 바뀐 환경에서 일했지만 두려웠던 첫 마음에 비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어색한 마음과 진실 된 마음을 맞춰 가다 보니 자주 보진 못해도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 같다.
사람이 있으면 역시나 사건도 존재한다. 올해는 과거와의 조우에서 나름의 결실을 얻었다. 도마 안중근을 만나러 하얼빈과 대련에 다녀왔고, 6.10항쟁 사건에 맞춰 1987년 당시 대학생들과 세대를 넘는 소통도 했다. 대전형무소 100년을 맞아 골령골 학살 유족들의 눈물의 대화도 나눴다. 단재 신채호를 대전의 대표 인물로 세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단재 선생에 대한 기사는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잘한 것 없는 한 해지만 그런대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부단히 달려왔다는 것 하나만큼 꼭 기억하고 싶어졌다.
아주 오래전 추억인데, 딱 한 번 식장산에서 새해를 맞은 적이 있다. 동이 틀 무렵에야 도착한 식장산에서 벅차오르던 감정은 지금 되새겨봐도 뭉클하다. 그곳에서 다짐했던 것이 있었다. '늘 똑같은 일상에 안주하지 말자. 조금은 큰 세상을 봐도 괜찮다' 대학의 껍질을 벗지 않았던 내가 30대의 나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다가오는 새해는 물론 따뜻한 이불 속에서 맞이할 테지만, 장소는 바뀌었어도 이 결심은 매년 새해를 맞을 때마다 변치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해 본다.
올해는 유난스럽게 덥지도 않았고, 사상 최악의 추위도 비껴간 듯 싶다. 계절처럼 무난한 시간들을 이제 흘려보낼 때다. 때론 잊어야 살기 편하고, 때론 마땅히 기억해야 할 일도 있다. 2019년이 가도 2020년이 와도 삶은 계속 이어져 갈 거다. 좌절과 기쁨 속에서 때론 깊은 슬럼프에서 허우적댈지언정. 식장산에서의 아침, 그 두근거림을 떠올리며 자세를 고쳐 앉아본다.
이해미 교육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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