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미 편집부 차장 |
그런데 같은 날 전 씨는 반란 가담자들과 고급 중식당에서 모임을 갖고 1인당 20만 원이 넘는 '호화 오찬'을 즐겼다. 이날 모임에 참가한 '반란 주역'들은 전 씨에게 '각하'라는 호칭까지 썼다고 한다. 하필이면 12월 12일에. 자중해야 할 날이다. 이를 두고 '12·12 자축파티'가 아니냐는 조롱도 나온다. 앞서 전 씨는 골프장에서 운동을 즐기는 모습이 포착돼 논란이 됐다. 이렇듯 호의호식하는 모습이 계속 보이자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은 갈수록 폭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 씨는 치매를 앓고 있다며 5·18 관련 재판에도 출석하지 않고 있다. 골프 치고 코스 요리를 즐기는 모습에서 반성과 뉘우침은 찾아보기 어렵다.
12·12 군사반란이 어떤 사건인가. 바로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일이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장세동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는 군대를 동원해 군 주도권 장악에 성공한다. 신군부 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한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전두환의 신군부는 공수부대 투입명령에 이어 비상계엄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과 일반 시민에까지 계엄군의 무차별 폭행이 자행됐고, 당시 사망·행방불명 등 차마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피해자가 나왔다. 이렇게 집권한 전두환은 그해 9월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그는 직선제 개헌 등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에 군사탄압으로 일관하며 무려 7년을 집권한다. 전두환 정권의 종말은 1987년 1월 터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서 비롯된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대공수사단 조사 도중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거리시위가 잇따른다. 하지만 전두환은 직선제 개헌 유보(4·13 호헌 조치)로 투쟁 열기에 기름을 붓는다. 그러다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부상으로 사경을 헤매게 됐고, 들불처럼 일어난 민주화 투쟁은 6·29선언 발표로 수습의 실마리를 찾는다.
몇 년 전 6·10 민주항쟁 30주년 촛불집회에서 고 박종철 씨 친형 종부 씨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그 시기를 직접 겪지 않았음에도 뭉클함이 전해온다. "꿈속에서 스물세 살의 종철이를 만납니다. 이제 곧 저는 살아오는 종철이를 만날 겁니다. 시퍼렇게 되살아오는 민주주의를 마중할 겁니다. 그 민주주의를 부둥켜안고 이야기할 겁니다. 이제 다시는 쓰러지지 말자고…."
피로 물들였던 역사에 대해 이제라도 사죄하길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인 걸까.
원영미 편집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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