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토요일, 남편과 큰 아이는 목욕을 하러가고 집에는 나와 3살 딸아이만 남아 간식을 먹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주말 저녁이었다.
갑자기 민방위 훈련 때나 들었던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지금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주민 여러분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통해 즉시 밖으로 대피해 주십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순간 '무슨 일이지?' 싶었지만 종종 있는 오류로 인한 방송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정정방송이 나올 것이라고 믿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파트 주민들도 대부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5분이 넘도록 정정 방송은 나오지 않았고 차츰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진짜 불이 난 것일까? 정말 대피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도중 아파트 여기저기서 현관문 여닫는 소리와 함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나기 시작했다. 앞집에서도 "빨리 내려가자"며 중학생 아이가 아빠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지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뭘 가지고 가야하지? 가방, 지갑? 통장?'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일단 핸드폰만 손에 들고 급하게 아이의 외투를 입혔다.
아이에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 무서워 할까봐 "우리 내려가서 아빠랑 오빠 기다리자"라고 말했다. 말은 태연한 척 했지만 가슴은 두근두근거렸다.
현관문을 여니 계단은 내려오는 사람들로 쿵쿵대는 소리가 가득했고, 엘리베이터는 25층부터 내려오는 사람들로 거의 멈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큰애와 남편이 1층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고 난 아이를 안고 뛰어 내려갔다. 7층부터 내려가는 길이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고, 1층에 도착해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방송은 잘못된 것이었다. 화재 경보기를 교체하던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라고 했다. 다들 그럴줄 알았다라며 안도했다. 한 주민의 "이런 기회에 서로 얼굴이나 익히라는 건가 보네"라는 농담에 웃기도 했다.
20여분간의 해프닝이었지만 '만약 정말로 아파트에 불이 난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만약 진짜 화재였다면, 모두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을 것이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오면서 또 다른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고층에 사는 주민들은 엘리베이터 탑승은 위험한 행동이다.
사건사고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는 안일한 마음이 나에게도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경험이었다.
집으로 올라와 텔레비전을 보고 저녁을 먹으며 평소와 같은 일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 누군가는 내가 느낀 짧은 공포를 실제로 겪는 안타까운 일도 생길 것이다. 부디 올 겨울 안타까운 화재 소식이 없기를 바라본다.
서혜영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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