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김칫독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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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김칫독 자리

양동길 / 시인, 수필가

  • 승인 2019-12-06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요즈음 김장이 한창이다. 봄의 장담금기와 더불어 한국인의 중요 연중행사 중 하나이다. 시골에서는 김장하는 날 하루 행사가 아니다. 파, 마늘, 깨, 고추, 무, 배추 등 김치 담그는데 필요한 채소를 일 년 내내 심어 가꾼다.

시골집 뒤뜰 장독대에 항아리가 서너 줄 도열해 있다. 배가 불러 비슷하면서도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굳이 보기 좋게 정리해 놓지 않아도 운치 있고 정감이 넘친다. 뚜껑 위에 광주리 놓고, 감이나 생선 말리는 것도 전형적인 장독대 풍경의 하나다. 하얀 눈이 쌓인 모습은 어떤가? 숨구멍 터주려, 종종 물걸레로 항아리 닦던 어머니 모습이 아늑히 어른거린다.

독을 한자어로 옹기(甕器)라 한다. 흙으로 빚어 약토(藥土)라는 황갈색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든다. 옹기는 발효음식을 많이 먹는 우리 식생활에 꼭 필요한 저장 및 생활 용구로 그 역사가 꽤 깊다. 발효성뿐 아니라 통기성, 저장성이 뛰어난데다 가격까지 저렴해 어느 집에서나 사용하고 그 쓰임새도 다양하다.

독, 항아리, 단지 등 크기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기도 한다. 용도에 따라 물항, 술항, 쌀항, 똥항, 동이, 시루, 소래기, 널박지, 옴박지, 자라병, 좀도리, 귀댕이, 질화로, 장군 등으로 부른다. 편의성, 우수성 때문에 생활용기 대부분 옹기로 만들어 썼다는 말이 된다. 항아리는 김치뿐 아니라, 각종 곡물, 장류, 양념류 등의 보관 용기이다.



숙성조건이 김치의 맛을 좌우한다고 한다. 조건 중 하나가 일정한 온도 유지다. 지금같이 전자제품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 땅속에 보관하여 온도 변화를 적게 했다. 항아리를 땅에 묻고, 짚으로 엮은 나래를 주위에 여러 겹 둘러 주었다. 때로는 항아리에 금줄을 둘러주었던 기억도 있다. 무는 땅속에 통째로 묻어 보관 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잘 못 묻으면 바람이 들어 맛이나 식감을 망치기도 한다.

항아리는 주둥이가 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작게 되어있어, 뚜껑을 열어도 온도 변화가 거의 없다. 김치냉장고도 이러한 선조의 지혜를 따른 것이다. 일반 냉장고는 옆으로 여닫이문이 달려 있지만 김치냉장고는 위에서 열게 되어있다.

김장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엄청 많은 양의 김장을 하였다. 사시절 신선한 야채가 제공되는 요즈음은 김치를 많이 담지 않는다. 배추를 손질하여 절이는 일에 손이 많이 갔다. 이틀은 꼬박 일해야 했다. 몇 해 전부터 절인 배추를 주문한다. 종류도 많이 줄었다. 엊저녁에 손질해 놓은 갖은 양념을 넣어 소를 만든다. 한 나절에 거뜬히 김장을 끝낸다.

빨간 양념이 덕지덕지 붙은 배추 잎에 깨소금을 듬뿍 찍어 게걸스럽게 먹는다. 수육 한 점 싸서 먹는 것도 좋고, 술 한 잔 곁들이니 세상천지 이보다 맛난 음식이 있을까 싶다.

두말이 필요 없다. 잘 익은 김치만 있어도 밥 한 공기는 거뜬하다. 문고리에 물기어린 손이 닿으면 순식간에 얼어붙는 이른 아침, 김칫독 열고 잘 숙성된 김치 한 포기 꺼내, 썩썩 썰어 끼니를 준비하는 여인의 수고와 정성도 맛을 더한다.

평소 자별하게 지내는 국악원 원장이 있다. 어쩌다 만나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나누는 사이다. 가정생활을 들여다 본 일은 없지만, 잘 하는 노래만큼이나 살림도 잘하는 것으로 안다.

해마다 김장할 때면 반드시 남편이 맛을 보도록 해왔다고 한다. 특별히 도와주는 일은 없지만, 지금도 자기가 없으면 김치를 담그지 못하는 것으로 안단다. 절대미각을 지닌 대장금이라도 되는 듯 우쭐대기도 한다나. 남편의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라 한다. 참 지혜로운 여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동적이냐 피동적이냐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역할을 뒤집어 생각하면 자리가 된다. 누구나 저마다 자리가 있다. 아버지 자리, 남편 자리, 자식 자리, 이웃 자리, 사회 자리, 그 자리를 지킬 때 존경의 대상이 되고 보람이 된다. 자리가 너무 많아도,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겨도 불행으로 느낀다.

나이 들수록 설 자리를 잃는다. 어떤 일을 훌륭히 해 낼 수 있는 여력이 있는데도 말이다. 감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소소한 자리라도 만들어 주는 것이 어떠한 복지나 배려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야기 하나 덧붙인다. 정성들여 빚은 항아리가 울퉁불퉁 못생겨, 태어나자마자 마당가에 버려진다. 어느 날 땅에 묻히고, 일하는 사람과 동네 아이들 오줌독이 된다. 오줌독이 된 것도 서러운데 겨울이 되자 얼어붙는 것이었다. 얼어 터질까봐 조마조마 겨울을 난다. 봄이 되어 오줌이 농사의 거름으로 쓰여 다소나마 보람을 얻는다. 세월이 지나 가마터에 절이 들어서고 항아리는 종 아래 묻혀 종의 울림통이 된다. 쇳소리를 품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낸다. 참고 견딘 결과이다. 사람마음을 울리는 고운 종소리에 일조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가. 정호승의 「항아리」내용 요약이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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