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우 대전미술협회장 배재대 교수 |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먼저 더 찾아뵙고 사흘이 멀다 하고 연락도 드렸지만, 많이 무심해졌다. 가을의 수확은 어머니 마음이라더니 어머니가 더 그립다.
몸도 마음도 많이 무뎌진 탓에 가을이 왔나 싶었는데 길가에 수북하게 떨어진 낙엽들을 보니 가슴이 내려앉는다. 낙엽이 내 생각만큼 쌓여 있는 것 같다.
만추(晩秋)의 밤이 깊어간다. 그림을 하다가도 정리할 때가 있는데, 그러다 보면 오래전 그림을 보게 된다. 그림을 보면서 그 당시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기억을 더듬는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시간의 척도는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림에 마음을 두고 가치를 둔다. 조금 예쁘고 재밌게 그린 그림은 팔리기도 하지만, 절대 팔릴 수 없는 그림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 시간의 기억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림은 때로는 삶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내게 더 큰 의미는 나만의 특별한 시간의 기록이자 기억이다. 그래서 화가로 산다는 게 기쁨이 된다.
올해도 돈 안 되고 기분 좋게 하는 그림을 많이 그려야 하는데, 돈 들어갈 데는 많고 돈 안 되는 그림을 계속 그려 가야 하기에 나의 이중생활은 늘 공개되는 것 같다.
나의 그림은 그리움을 안고 있지만, 아픈 시간이 배어 있다. 그래도 아픔이 배어있지 않으면 그리움이 없듯이 보내는 방법과 잡아두는 방법을 알 길이 없으니 무심히 지나는 시간에 눈물만 흐른다. 그 시간이 모여 아픔이 되지만, 반평생을 넘게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아직도 많이 아파야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른 아픔에 상처를 받지 않을까?
화가인 아빠가 좋아 보였을까. 어릴 때부터 보고 장난감도 미술 재료들이다 보니 자식도 화가의 길을 가려고 한다. 군대를 다녀온 뒤로 자신을 그림에 담는 아들은 어느덧 졸업하고 서울서 대학원 생활을 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제자들에겐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얘기하는데, 그림을 하는 아들에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들의 아픔은 어떤 그리움으로 화폭에 담기게 될지 모르기에 말없이 지원하려 한다.
삶이 깊어지면 그림도 깊어질까? 어쩌면 내가 살아온 건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시간들이었는지 모르겠다.
인생살이 세옹지마라 했다. 내가 가는 길 나도 모르고 사는 게 어찌 나뿐이랴. 만추(晩秋)의 밤. 나는 내 아버지를 생각했고 화가의 길을 가려는 아들을 생각한다. 먼 훗날 시간이 흘러 아비가 고희(古稀)전을 할 때 즈음, 나처럼 아들도 화가의 길을 후회하지 않고 행복한 화가로 살아가길 바란다.
인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이 시간도 한 시간 아니 일분 후에도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런 불확실성에도 살지만 태연하게 살아가듯이 그래서 희망을 생각하는지 모른다. 음~ 한 달여 남은 이 해도 숙성된 깊은 포도주 맛처럼 지나가 주길.
/이영우 대전미술협회장·배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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