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의 지속은 유의미할까. 어느 철학자는 "인간에게는 과거를 이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앞서 일어났던 현상들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나치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경험을 기록한 빅토르 프랑클은 존재 의미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는 수용소에서 동료 수감자들에게 과거 경험했던 기쁨의 빛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빛나는 지를 들려줬다. '네가 경험한 것을 지상의 그 어떤 권력도 앗아갈 수 없으리니.' 경험이란 실존의 한 형태다. 과거의 모든 행동, 크고 작은 생각, 지나간 모든 일들이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만 그 기억은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
여기, 기억을 잃어버린 이들이 있다. 자아를 잃어가는 서연(수애)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라며 오열한다. 나이 서른에 알츠하이머라니. 지형(김래원)이 점심식사를 마치기 전에 저녁 먹자고 데이트 신청할 정도로 매력있는 젊은 여성이 먹고, 싸는 본능만 남아 서서히 죽어간다. 본능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순수하지만 날 것 자체여서 역겨움을 주기도 한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창동은 추하고 더러운 것 뒤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했다. 영화 '시'의 주인공 미자(윤정희)는 성폭행 가해자를 손자로 둔 할머니의 죄의식과 고통, 그리고 시를 쓰기 위해 찾아야 하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을 이야기한다. 미자는 명사도, 동사도 잃어가는 치매 초기 환자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자 미자(美子·윤정희의 본명이다)가 진짜 치매에 걸렸다.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남편 백건우의 고통이 전해진다. "작년 성탄절엔 날 알아봤는데 올해 4월부터 절 잃어버리셨어요"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딸 진희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며 나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올해 90인 나의 엄마도 치매를 앓는다. 엄마도 기억을 잃고 있는 중이다. 손주들의 이름이 헷갈리고 날짜와 시간, 공간 개념이 흐릿해지며 느닷없이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예전의 단정한 성품이 하나하나 흐트러지는 엄마를 대할 때마다 당혹스럽기만 하다. 큰언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어느 가을 엄마는 차를 타고 가면서 "단풍 참 곱다. 이렇게 좋은 걸 못 보고 왜그리 서둘러 갔는지"라며 한탄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떤 어미가 온전할 수 있을까.
치매는 최소한의 삶의 존엄성을 지키기 어려운 질병이다. 기억이란 도대체 뭘까. 한 사람에게서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은 본능만을 향해 달려가는 퇴행이다. 사람의 삶은 기억으로만 남을 뿐인데, 기억이 없어진 나는 누구인가. 리어왕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없는가?"라고 호소했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은행잎이 바람에 나비처럼 날린다. 숨막힐 듯한 계절의 아름다움에 발길을 멈춘다. 그 낙엽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억의 파편처럼 보인다. 이창동은 미자의 나이는 하나하나 잊어가는 시기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삶에 대해 질문할 나이라고 했다. 잎새를 떨군 앙상한 나무 위의 하늘이 텅 비어 푸르렀다. 나의 엄마와 미자는 다시 아이가 된다.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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