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짙어간다. 코발트빛 하늘은 눈부시고 호수는 더욱 깊어진다. 불타오르는 단풍은 차마 보기가 가슴이 떨린다. 은행잎은 포스터물감으로 물들인 듯 샛노랗다. 이렇게 가을이 또 가는 것인가. 언제 왔는지 모르게 언제 가는지 모르겠구나. 다음 가을도 이렇게 가슴 아플까. 보문산에서 맘껏 가을의 정취에 취했다. 종아리는 탄탄해지고 머릿속의 잡념을 말끔히 씻어 내려 걷고 또 걸었다. 보잘것 없는 세상사 멀리 치우자.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은 플라타너스 길에 천진한 아이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음악 소리가 들렸다. 식당에서 들리는 노래는 김범수의 '하루'였다. 오랜만에 듣는 노래에 난 그만 발길을 멈췄다. '사랑이 날 또 아프게 해요 사라이 날 울게 하네요~'. 가던 길을 멈추고 난 노래를 듣기 위해 길가 텃밭에 심어져 있는 애먼 깻잎을 만지작거렸다. 역시 가수는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 그게 가수다운 것이다.
이 노래가 2천년대 초에 나왔던가. 그 당시 내 친구는 이 노래를 늘 흥얼거렸다. 그 친구는 좋아하던 사람을 떠나보내고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좋아한다는 표현도 못하고 끙끙거리다가 어느새 그 남자는 친구의 친구와 결혼한다는 얘길 들었던 차였다. 그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친구도 잃고 남자도 잃는 비참한 현실. 하루하루 방황 속에서 친구는 밤마다 나에게 전화해 넋두리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나 또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김범수의 '하루'가 가슴을 후벼 판다. 사랑의 온도는, 사랑의 색깔은 다 같은 것인가. 그래서 노래에서 위안을 받는다. 노래 부르는 가수와 듣는 이의 공감. 이것이 노래의 힘이다. '사랑은 꿈을 때듯 허무하네요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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