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아기오리가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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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아기오리가 따라온다

  • 승인 2019-11-03 15:40
  • 수정 2020-06-30 11:33
  • 신문게재 2019-11-04 22면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십대 후반이 되기 전 오랫동안 인종을 차별했다. 1990년과 1991년, KBS 2TV에서 방영한 외화 드라마 <천사들의 합창> 시청이 계기였다. 멕시코의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로, 자상한 히메나 선생님과 다양한 성격의 어린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모습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모든 어린이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었지만, 그 중 시릴로라는 소년이 인상적이었다. 목수의 아들로 의리있고 성실하면서 착한 시릴로는 흑인이며, 금발의 백인 소녀 마리아를 짝사랑한다.

시릴로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의 짝사랑은 응원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옛날 드라마에서 쉽게 묘사됐던 '못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부유한 의사의 딸이었다. 천한 것들과 닿으면 병균이 옮는다며 항상 하얀 장갑을 끼고 다녔다. 늘 쌀쌀맞게 돌아서는 마리아의 뒤에서 시릴로는 말을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마리아가 하얀 장갑을 떨어트리고 시릴로가 그걸 주워줬는데, 마리아는 그 자리에서 장갑을 버린다.

드라마를 본 건 초등학교 1학년 전후의 잠깐이었지만 시릴로와 버려진 장갑에 대한 감정 이입은 한 가지 인식을 오래 남겼다. 흑인은 착하고 진실된 사람, 백인은 돈이 많으며 차갑고 나쁜 사람이라는 편견이었다. 드라마 후반부에서는 마리아의 태도도 개선되건만 실제로 외국인과 부유한 사람을 만나본 적 없는 경험의 부재, 선악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 부족은 근거없는 편견을 오래 지속하게 했다.



#배우 허준호씨의 악역 연기를 보면서 그를 선한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은 1995년에 시작됐다. 배우 이종원씨를 배신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한 <젊은이의 양지> 때문이었다.

극중 하희라씨가 연기한 차희는 명문대에 진학한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미혼모가 된다. 차희의 곁에는 항상 묵묵히 도움을 주는 동네 오빠가 있었는데, 그 역할이 허준호씨였다. 차희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주고 싶어 할 만큼 그를 아끼고 도움을 주려는 모습은 무한한 선(善)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이후 여러 드라마 속에서 아무리 악을 표현해도 '저 사람은 선한 사람이지만 악역을 잘하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바뀌지 않고 있다.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대상을 보호자라고 믿는 아기오리와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의 시청각 경험은 오랜 믿음을 남긴다. 그 믿음은 어른이 되면서 타인을 대하는 기준으로 자리잡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드라마, 만화 속 캐릭터를 현실 속 인물이 아니라 해도 단편적으로 쉽게 묘사해선 안 되는 까닭이다. 폭력적인 게임에 연령 제한이 필요한 것도, 교복을 입은 성인여성이나 아동·청소년을 성착취한 포르노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결정장애, 꿀먹은 벙어리 같은 차별적인 단어를 무심결에 쓰지 않았는지 생각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처음 겪어 나가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는지는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세상을 좌우한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영화를 보게 해줘야 한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의 감정을 생각해 보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된다. 직업이나 성별, 외모 등 그 무엇도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음을 보여줘야 한다. 노키즈존처럼 소수의 사례로 다수를 구분 짓고 거부하는 모습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시험 합격 여부를 기준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고,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대우를 받는 모습도 사라져야 한다. 오늘 아이들이 본 것이 우리가 살아갈 내일의 세상을 만든다. 결국 어른으로 사는 이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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