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18급 바둑 실력자가 수백 명 모인다고 유단자를 이길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당장은 불가능할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 가능해진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
대형 컴퓨터 운영체제는 유닉스가 대종을 이루었다. 대형 컴퓨터가 만들어진 후에 개인용 컴퓨터(PC)가 만들어졌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으나, PC 운영체제는 모두 대형 컴퓨터 운영체제를 모체로 한다. PC에서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진 운영체제 중에 리눅스(Linux)라 하는 것이 있다. 시작은 1991년 핀란드 헬싱키 대학 학생이던 리누스 토발스(Linus Tobals)이나 그의 희망대로 개방형 소스(Open source)여서 전 세계 개발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를 관리하는 어떤 기업체나 조직도 없다. 그러함에도 일정한 틀에 의해 잘 관리유지 되고 있다. 사용자가 굳이 의식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으나, 리눅스 기반의 운영체제가 속속 등장하고, 그 중엔 획기적인 것들도 많다. 필자는 리눅스 서버를 10여 년 운용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초기여서 어설픈 점이 많았으나, 현재는 클라우드 컴퓨팅, 스마트폰, 임베디디, 슈퍼컴퓨터가 대부분 사용한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것이 구글에서 배포하는 모바일 운영체제 '안드로이드(Android)'이다.
안드로이드는 미국의 검색 서비스 업체 구글(Google)사가 최초 개발하였다. 무료개방형 소스 운영체제로서의 개발과 촉진에 '오픈 핸드셋 얼라이언스(OHA, Open Handset Alliance)'가 앞장서고 있다. 이 단체는 구글이 주도하였지만, 국내의 삼성전자, 엘지전자를 비롯한 수십여 개 세계의 기술 및 이동 전화기회사가 모여 컨소시엄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개발자들이 참여, 각종 앱을 비롯한 엄청난 기능들이 추가되고 있다.
리눅스 본래의 자유 철학이 담긴 스마트폰도 출시를 앞두고 있다. 제조사가 권리를 주장하는 일체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류 공동의 자산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웹web 1.0은 생산자가 자료를 갱신하는 웹사이트 집합체였다. 웹2.0은 주체가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가 된다. 상호작용을 통하여 콘텐츠를 생성하며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해나간다. 사회적으로 소수 의견이 교환되고 문화 저변이 확대되는 핵심역할을 하는 장점이 있다. 모든 SNS가 이에 해당한다 하겠다. 반면 자신들만의 의견이나 행동을 표출, 과장되고 세력화되는 우려를 안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그를 일시적 현상으로 본다.
미래 경제와 산업을 선도해가는 것이 정보산업이다. 정보산업 저변에 깔려있는 철학의 한 부분을 살펴보았다. 누구나 참여하여 함께 만들고 공유하며 공감하는 시대에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곧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철학이라 생각한다.
근래에 접촉 수, 공감 수, 통계, 순위 등의 조작을 목격했다. 현재도 조직적으로 조작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낙후된 문화의식의 단면이다. 커다란 시대착오적 발상이요 그릇된 행위이다. 사람들은 각자가 수립하는 이해방식 또는 경험으로 정보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더할 것은 더하여 새롭게 구축해 간다. 그것을 스키마(Schema)라 한다. 경험을 통하여 계속 수정된다. 처음엔 속을 수 있다. 왜곡되거나 상실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바른길을 찾아가게 될 것이라 믿는다.
말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그중 하나가 사문난적(斯文亂賊) 아닌가 한다. 처음 만들어질 때는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일컬었다.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사문난적이라 했다. 당파싸움이 잦던 때에는 상대 붕당을 매장 시키는 악의적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자면 진리에 반하는 사이비 학문 또는 논리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진리를 팔아 영리를 취하는 자를 의미한다 하겠다.
최근 몇 개월 정국을 보면서 착잡한 기분이 든다. 시대착오적 발상이나 행위로 사회가 혼란스럽다. 말이 되지 않는 논리를 펼쳐 빈축을 사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 역사 역행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현장이 대한민국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진보라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이다. 과거로의 회귀나 정체를 진보라 하지 않는다. 과거의 이념에 매몰되어 있으면서 좋은 말만 모두 갖다 붙인다고 진보가 되는가? 말만 따사롭고 풍성하게 한다하여 진보라 할 수 있는가? 미사여구나 교언영색은 엄연한 가식이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사회를 용서하지도 않는다. 지성이 있기 때문이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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