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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what a wonderful world'. 영화 '굿모닝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이 소재다. 화염과 폭탄이 터지고 죄 없는 민간인이 죽어가는 아비규환을 보여주는 화면 전체를 관통하는 노래가 장엄하게 울려퍼진다.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역설적인 이 노래가 악몽같은 현실을 또렷하게 각인시킨다. 이 세상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얼핏 보면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지구는 돌고 해는 아침마다 떠오른다. 눈부신 햇살 아래 빛나는 초록의 세상 아래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지만 공포와 절망의 또다른 세계가 우리를 잠식하고 있다. 인류는 거시사로 역사를 판단하지만 미시사야말로 참 역사가 아닐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누가 그러는가.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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