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태 대전 서구청장 |
강원도 태백의 한 산골 마을에는 독특한 이름의 버스 정류장이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권상철 집 앞'. 정류장에 동네 사람 이름이 붙은 사연은 이렇다. 권 씨의 부인은 1999년 암 진단을 받았다. 병원 통원치료를 위해 자주 버스를 타야 했는데 깊은 산골이라 집에서 버스 정류장이 너무 멀었다. 권 씨는 태백시에 정류장 설치를 건의했고, 그의 사정을 들은 태백시는 권 씨 집 앞에 정류장을 세웠다. 당시 근처에는 다른 건물이나 상징물이 없어 정류장 이름을 '권상철 집 앞'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사연은 지난 2006년 한 공중파 방송 TV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졌다. 암에 걸린 아내를 위하는 남편의 따뜻한 마음, 이런 마음을 외면하지 않은 지방정부의 작지만 세심한 배려가 화제를 모았다. 필자 역시 이 스토리를 듣고 크게 감동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행정의 결과물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예산이 필요하고 민원의 소지는 없는지, 법적 문제는 없는지 따져봐야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버스 정류장이 절실한 다른 곳과의 형평성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문제다.
조금 덜 필요한데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일이 있고, 매우 절실한데 소수의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일도 있다. 이것은 시시비비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우선에 둘 것인지는 철학의 문제다. 그동안 지방정부의 행정이 주로 전자에 초점이 맞춰졌던 게 사실이다. 중요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와 인식의 변화로 후자에 방점을 찍는 사례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대중매체에 노출되지 않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작지만 세심한 행정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우리 서구가 고독사 공영장례 지원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첫 대상자는 서구 가장동에 거주하는 72세 어르신이었다. 가족도 없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홀로 생활하다 무더위가 시작되던 지난 7월,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서구는 장례에 필요한 행정적 지원과 경비를 지원하고, 빈소와 장례에 필요한 물품은 대전 대청병원에서 제공했다. 또 장례 절차와 추모 의식은 대전보건대 장례지도과 학생들이 맡았다. 쓸쓸하지 않은 죽음은 없다. 하지만 홀로 외롭게 살았던 어르신의 마지막 가는 길만큼은 외롭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공영장례를 통해 마지막 가시는 길이나마 외롭지 않게 보내드린 분이 벌써 네 명째다.
웰빙(well-being) 못지않게 웰 다잉(well-Dying)도 중요한 시대다. 특히 1인 가구의 증가로 가족은 물론 사회와 단절된 채 생활하는 분이 적지 않다. 사회적 관계망이 취약한 가구를 대상으로 지역 안전망을 촘촘하게 구축하는 것이 지방정부의 중요한 과제다. 서구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존엄한 죽음을 기리겠다는 것이 고독사 공영장례의 핵심 취지다. 다행히 뜻을 같이하는 건양대병원과 대청병원 장례식장, 성심장례식장, 대전보건대 등이 기꺼이 손을 잡아줘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또 고독사 예방을 위해 SK텔레콤과 독거노인 가구에 AI(인공지능) 스피커를 설치하는 스마트 케어 사업도 진행 중이다.
버스 정류장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내를 위해 집 앞에 버스 정류장을 유치했던 권상철 씨도 눈을 감았다. 마을 주민들의 협의 끝에 작고한 권 씨의 뒤를 이어 장남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정류장은 이제 '권춘섭 집 앞'으로 불린다. 지난달에도 또 다른 TV 프로그램에서 이 사연을 다뤘다. 아무리 작아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행정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대전 서구에도 그런 흔적이 많이 남았으면 좋겠다.
장종태 대전 서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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